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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포장이 날개…딸기와인 병 바꾸니 중국서 러브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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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호 19면

산업디자인 전문가 김곡미 연암대 교수

김곡미 교수는 우리 농촌을 돌아다녀 보면 포장 디자인만 제대로 해도 세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상품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김현동 기자]

김곡미 교수는 우리 농촌을 돌아다녀 보면 포장 디자인만 제대로 해도 세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상품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김현동 기자]

산업디자인 전문가 김곡미 연암대 교수는 주말엔 서울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주말이면 새벽같이 고속도로를 달려 어느 농촌의 어느 농가로 향하고 있어서다. 농산물포장 디자인 코칭을 위해 직접 농장을 둘러보고 농부와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가 하는 일은 계란, 꿀, 배, 여주와 같은 농산물 포장 디자인이다. 최근엔 전통 장류를 문화상품으로 내놓는 포장방안을 연구한 논문으로 ‘지식재산교육학회’의 논문대상(특허청장상)을 받았다. IT관련 논문이 주류를 이뤘던 논문경연에서 농산물포장으로 대상을 받은 것이다.

화장품서 농산물 디자이너로 변신 #농사 배우며 패키지 디자인 코칭 #중저가 제품, 프리미엄 포장 안 돼 #상품 정확하게 알고 디자인해야 #농산물이 6차산업 되기 위해선 #포장의 아이덴티티 구축작업 필요 #농산물 포장 지식재산 될 수 있어 #트렌드 따라가야 세계시장서 경쟁

한데 그를 진작부터 아는 사람들에겐 농산물디자이너라는 그의 직함이 의아하다. 실제로 그는 국내 명품 화장품 디자이너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LG생활건강 수석디자이너 시절 명품 화장품 브랜드 ‘후’를 성공적으로 론칭시켜 당시 ‘굿디자인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고, 2011년 디자인코리아에선 ‘산업포장’도 받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천안에 있는 농축산특성화대학인 연암대학으로 옮기고, 전국방방곡곡 농산물을 찾아다닌다. 또 요즘은 충북대 축산학과 석사과정에서 공부 중이라고 했다. 최근 뜬금없이 전통장류 포장 논문으로 논문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그의 난데없는 변신이 궁금해 그를 만났다.

굿디자인 국무총리상, 산업포장 받아

해미읍성 딸기와인.

해미읍성 딸기와인.

어쩌다 명품 화장품에서 농산물 디자이너로 옮기게 됐나.
“포장 안에 담는 품목은 달라졌지만 상품 패키지(포장)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같은 일이다. 패키지 디자인은 결국 상품이 잘 팔리도록 하는 일이다.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장르를 옮기는 데 한계가 있지만 포장 디자인은 품목을 바꿨다고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화장품에서 농산물로 포장 디자인 영역을 바꾸면서 별다른 문화적 충격 같은 게 없었다는 얘기인가.
“그렇지는 않다. 처음 농축산대학에 왔을 때는 막막했다. 포장 디자이너는 해당 상품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아야 하는데, 농산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대학으로 온 뒤 두 달쯤 지났을 때, 원예과 학생들의 영농창업과정에 쓰고 싶다며 ‘배 박스’를 디자인해 달라고 했다. 너무 고마워서 밤을 새면서 배에 대해 연구했다. 그 ‘배 박스’가 알려져 농림부에서 ‘6차산업 전문위원’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그 덕분에 디자인 코칭을 하러 수업 없는 주말이면 농촌에 가서 농부들과 얘기하고, 농사 방법을 배우면서 농산물을 익힐 수 있었다.”
지돈가 소시지.

지돈가 소시지.

포장 디자인을 하는데 농가를 직접 가야하나.
“패키지 디자인은 앉아서 예쁘게 그리는 작업이 아니다. 상품을 잘 모르면 포장에서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포장은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일종의 신호다. 품질과 가치에 따라 소비자가 어느 정도 지불해야 하는지의 판단기준을 포장에서 제공해야 한다. 프리미엄 상품은 프리미엄 포장, 중저가 상품은 중저가 포장을 해야 한다. 낮은 품질의 상품에 프리미엄 포장을 하면 소비자를 속이는 것이고, 프리미엄 상품을 엉성하게 포장하면 생산자가 손해 본다. 그러니 상품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농산물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나?
“그래서 농산물 맛만 보는 게 아니라 농가를 직접 방문하고, 생산자와 오래 이야기를 한다. 7년간 다니다보니 이젠 농가 앞에만 가도 잘되는 집인지 아닌지 판가름이 된다. 농사를 잘 짓는 농장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정돈이 잘 돼 있다. 농부와 얘기해 보면 그 집 농산물을 더 잘 알게 된다. 스토리가 있는 농산물이 훨씬 맛이 있다. 예를 들어 한 꿀벌 농장에 갔는데, 그 농부는 ‘우리 꿀이 얼마나 맛있는지 반달곰이 양봉장을 습격했어요’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디자인이 머릿속에 확 그려졌다.”
경기도 카페 파머스 애플 로고와 컵홀더.

경기도 카페 파머스 애플 로고와 컵홀더.

농산물 포장으로 지식재산관련 논문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농산물 포장이 어떻게 지식재산이 된다는 것인가.
“이번 논문은 장류 포장을 한국 고유의 지식재산으로 이미지화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였다. 장류와 농산물은 일반적 상품이어서 생산자 브랜드 정도만 붙여서 파는 걸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 브랜드 철학과 스토리텔링을 덧붙이고 한국 전통 문화자산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포장을 입히면 그 자체가 문화상품, 즉 한국의 지식재산이 된다. 외국엔 이런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선 닭고기 포장을 할 때 머리의 벼슬과 목의 깃털까지 살려서 포장하는데 이것만으로 프랑스 닭고기라는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이건 ‘한국 농산물’이라는 아이덴티티 작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농산물이 6차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포장의 아이덴티티 구축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국내 농산물 포장 수준은 어떻다고 보는가.
“한 대기업 생수병 색상을 보며 답답했던 적이 있다. 청색도 다 같은 게 아니라 신선도를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이 있는데 왜 굳이 이런 탁한 청색을 썼을까하는 생각에서다. 국내에선 소비자가 대기업을 믿고 사겠지만 처음 본 외국인은 선뜻 고르지 않을 게 분명한 색깔이었다. 대기업도 생수 같은 원물 포장에 대해선 이렇게 신경을 안 쓴다.”

축산품 배우려 축산학과 대학원 다녀

농촌을 많이 다녔는데 우리 농업산업의 미래를 디자인해본다면.
“사례를 들고 싶다. 사과농장을 하는 분이 아들이 농장 근처에서 사과주스 카페를 하고 싶어 한다며 상담을 해왔다. 한동안 주말마다 사과주스를 맛보러 전국을 다니면서 알게 된 게 있다. 젊은 세대가 농업에 참여하려면 농사가 아니라 농산물 가공품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로 주스, 칩, 잼, 분말 등 다양한 상품으로 개발하니 부가가치가 높아졌다. 카페 디자인과 상품개발을 함께 했는데, 이 카페에서 아버지 농장뿐 아니라 인근 농장의 사과까지 대량으로 사들여 지역 전체의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보았다. 또 청년 창업자들의 경우 이들의 상품은 기존 농촌의 상품과 다르다. 고구마 말랭이도 모양이 다르고, 다양한 실험을 하며 세련되어진다. 청년의 아이디어와 감각을 잘 지원해는 체계를 만들면 젊은 농촌도 가능할 걸로 보인다.”
축산학 대학원은 왜 다니나.
“우리나라 축산물 포장을 바꾸고 싶어서다. 농산물은 농가에 가고, 맛보고 하면서 배울 수 있는데 축산물은 최종 상품만 보고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기르는 과정부터 축산물의 특징까지 알아야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수 있어서 대학원 과정에 들어갔다.”
한국 농축산물 디자인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면.
“지금은 친환경 포장과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른 소포장 및 꾸러미 포장을 연구하고 있다. 농산물 포장도 시대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 또 농촌을 다니면서 각 지역 농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새로운 농산물을 만드는지 알게 됐다. 기발한 농산물도 정말 많다. 문제는 포장이다. 예를 들어 충남 해미읍성의 딸기와인은 내용물이 우수했는데도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를 현장코칭을 통해 디자인 리뉴얼을 했더니 곧바로 중국과 4억5000만원어치 수출계약을 맺었다. 이젠 우리 농산물도 글로벌 경쟁을 염두에 두고 트렌디하게 디자인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김곡미 교수 프로필

김곡미 교수 프로필

어느 농가가 농사 잘 짓는지까지 꿰뚫어

자기 삶의 현장에서 부지런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명성만 드높은 ‘뉴스피플’들보다 진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 사람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김곡미 교수였다. 그는 실력도 있는 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부지런할 수 있을까 늘 의아했던 인물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부지런하고 치열하다. 잘나가던 생활용품 패키지 디자이너 시절부터 상품디자인 하나 하려면 자기 상품뿐 아니라 비슷한 상품을 대조하며 써보는 극성스러움으로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대기업 수석디자이너에서 천안의 작은 농축산특성화대학으로 옮기고 농산물 포장을 한다고 했다. 이유에 대해서는 답을 피했다. 다만 “조직생활은 할 만큼 했다”고만 했다. 그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물었더니 “그럼에도 곁눈질 안 하고 일에만 매달린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실력을 키웠고, 실력만 있으면 할 일은 많다는 것이다. 농산물 디자이너가 된 후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됐고, 지금은 어느 지역 특산물 정도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도 어느 농가가 가장 농사를 잘 짓는지까지 알게 됐다며 이 분야에선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 즐겁다고 했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su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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