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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에 박힌 현대사 기념 공간, 역사 갈등 부추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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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호 20면

기념의 미래

기념의 미래

기념의 미래
최호근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5·18 해석 두고 진보·보수 대립 #정치 과잉, 기념문화는 제자리 #전기 마련해 기억 불임 막아야

우리 정치권은 5·18을 두고 아직도 옥신각신 중이다. 내년 총선을 의식해서인지 올해는 더 세게 붙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하자 제1야당 자유한국당도 맞받아쳤다. 이주영 의원은 지난 22일 “이 말을 놓고 ‘남로당의 후예가 아니라면 천안함 폭침을 다르게 볼 수 없다’는 말로 되돌려줘야 한다는 비아냥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고 주장했다. 5·18을 겪은 지 39년이 지났는데도 극심한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양극단 진영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에서 누구를,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 된 지 오래됐다. 사사건건 상대 진영의 기념일과 기념물은 물고 늘어지고 우리 진영의 것들은 성역화한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가 펴낸 『기념의 미래』는 이런 분열된 상황에서의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 기념문화가 갖는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오래전부터 ‘기억’에 관한 논문을 연구해 온 저자가 국내외의 많은 기념시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전문가적 눈으로 본 현장성을 풍부하게 담았다. 진영에 따라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기억의 정치, 역사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이제는 한 단계 진화해 기념의 문화로 이행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한국은 세계 최다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보유한 나라다. 동학농민혁명, 일제시대의  친일 협력 문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독재 시기에 자행된 인권 유린 등 부담스러운 ‘4중 과거사’를 중심으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경우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 과거사의 엄청난 무게 때문에 지금과 같은 기념의 붐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제주 4·3과 5·18 등에서 보듯이 어느 한 집단의 기억이 전체 국민의 기억으로 격상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지금처럼 정치권이 이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다면 제대로 된 기념은 요원한 과제가 될 것이다.

베를린 ‘테러의 지형도’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작품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나치 후원을 받은 민병대에 의해 강가에서 희생된 헝가리인 3500명을 추모하는 헝가리 작가들의 예술작품이다. 『기념의 미래』를 쓴 최호근 고려대 교수가 촬영했다.

베를린 ‘테러의 지형도’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작품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나치 후원을 받은 민병대에 의해 강가에서 희생된 헝가리인 3500명을 추모하는 헝가리 작가들의 예술작품이다. 『기념의 미래』를 쓴 최호근 고려대 교수가 촬영했다.

각종 과거사위원회의 시대를 거쳐 이제 본격적 기념의 시대가 찾아왔지만 사실 우리는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부실한 기념의 반복과 극단적 이념 대립은 오히려 기억의 불임을 동반하거나 기억 피로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억정치와 기억투쟁 못지않게 문화의 부재 또한 기억을 승화시키지 못하는 요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정치는 과잉인데 문화는 결핍된 상태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국가를 위한 죽음’을 나타내는 대표적 현충 시설이다. 이 모델을 집단학살이나 국가폭력 같은 ‘국가에 의한 죽음’ 희생자들을 위해 조성된 공원들에 베껴 놓았다. 국립 4·19 민주묘지, 마산 국립 3·15 민주묘지, 국립 5·18 민주묘지, 거창 사건 추모공원,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에 아무 생각 없이 동작동 국립묘지를 답습해 적용한 것은 개념 부족의 소산이라고 평가한다.

기념탑 높이 쌓기 경쟁도 경계했다. 현충문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게이트를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영원한 쉼터에 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획일적인 양식의 봉분과 묘역도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기념문화에 대한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나치 테러의 핵심 기구들이 있었던 곳에 설치된 베를린 ‘테러의 지형도’,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기념하는 이스라엘의 국립 기념공원 야드바셈, 9·11 테러를 추모하는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 기념물은 기념시설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건축물과 전시에 숨어 있는 그들의 치열한 논의와 궁리, 기본 개념을 도출하기 위한 숙고와 개념화의 자세를 배울 것을 권고한다.

기념의 목적은 살아있는 기억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비록 혼란스러운 기억투쟁의 와중이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의 공감을 모을 수 있는 기념시설의 업그레이드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기념의 미래』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교재로 삼을 만하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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