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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명예율과 규제 사이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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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사관학교에서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볼 때 시험을 감독하는 이가 없다. 이런 시험을 ‘명예시험’이라 부르며, 시험에 부쳐지는 대상이 공부한 내용 뿐 아니라 본인의 명예라는 점에서 적절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시험 부정행위는 생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며 이런 암묵적 규칙을 지키는 일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최악을 처벌하는 것이 규제 #최선을 강제하는 것은 명예율 #개인의 최선을 끌어내는 사회 #자발적 노력으로 만들어 가야

일반적으로 이상과 같이 명예율(honor code)에 의존해서 운용되는 시스템을 “명예시스템(honor system)”이라 부른다. 여기서 ‘명예’란 말은 반드시 사관생도나 고위공무원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존중’(honor)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운동선수는 스포츠맨십이 있고, 기업가들은 나름의 불문률이 있으며, 초등학생에게도 지켜야할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제물포고등학교는 무감독 시험을 60년 이상 유지해 오고 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명예율로 유지되는 시스템은 그 장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양심과 공동체의 가치를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확인하고 실천할 수 있다. 당장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이 정직하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에 자발적 실천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덤으로 이와 같은 시스템은 그것을 관리하는데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장점까지 있다.

그러나 명예율에 기반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율적 통제라는 이상은 한 두 명의 위반자들로 말미암아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지고 있다. 시험부정행위를 한 학생이 한 명만 존재하더라도 그 반의 명예율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입시부정이나 연구부정을 저지른 교수가 한 명만 존재하더라도 대학 전체의 명예는 훼손된 것이다. 한 번 깨진 믿음과 신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영문 이니셜로만 알려진 어느 위반자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에 각인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직업과 전문성과 공동체의 최악을 전제로 한 의심과 규제를 달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예율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로 채워지고 단단해져야 할 공간이 촘촘한 규제로 채워지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존중받는 자유로운 개인이 각자의 최선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이들의 노력으로 점점 풍요로워 질 수 있지만, 자고 일어나면 더 촘촘한 규제가 개인을 제한하는 사회는 무기력을 향해 하향한다.

우리가 구축한 시스템은 전 사회영역의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국가가 법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직접 관리하고 규제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왔다. 공무원은 외부 인사를 면담할 때 신고서를 낱낱이 작성해야 하고 교수는 연구비 영수증을 풀로 붙이는 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있다.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때 특정 전형이 몇 %나 되어야 하고 공직자가 조의금을 얼마까지 낼 수 있으며, 야구 국가대표는 누구를 선발하고, 학생이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줄 수 있는지를 국가로부터 유권해석 받아야 하는 시스템 말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것에 대해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가 각자의 참담한 자괴감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소수의 부패한 공무원들과 타락한 교수들과 컨닝을 하는 학생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와 관련된 사회적 비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문집단에 대한 신뢰가 없고 자발적 통제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사회는 외부적 통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 외부적 통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우회하고 유명무실화시킬 수 있는 집단 또한 해당 전문가 집단일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율이 사라지고 법적 규제만 남은 자리는 오히려 전문가 집단이 가장 수월하게 기거할 수 있는 곳이다. 명시된 규제만 영리하게 피해가면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하고 더 도전적이고 더 창의적인 것들을 굳이 고민하고 정면으로 다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규제가 무기력을 낳는 곳에서 우리는 기껏해야 평범한 교수와 교사들이 평범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평범한 관료들이 평범한 시민들에 평범하게 봉사할 것을 최선의 전망으로 가지고 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나은 전망을 가질 수는 없을까.

최악을 처벌하거나 방지하는 것이 법과 규제라면 최선을 강제하는 것이 명예율일 것이다. 물론 명예율이 어느날 갑자기 명예헌장을 선언하고 낭독한다고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시간과 노력과 참을성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1명의 위반자가 돌출한 곳에 사실은 99명의 다수가 참담한 마음으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고, 1명의 위반자에게 돌아가야할 처벌을 99명이 영원히 감수하게 되겠지만, 결국 각자가 자리한 곳에서 스스로의 전문성과 가치를 믿고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명예율을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이 99명에게 남겨진 몫이 아닌가 한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