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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도 탐험해야 한다" 카네기홀 수장의 신념

중앙일보

입력

카네기홀이 2012년 창단한 오케스트라 NYO-USA의 단원들과 함께 한 길린슨 예술감독(맨 오른쪽). [사진 크리스 리(Chris Lee), 카네기홀]

카네기홀이 2012년 창단한 오케스트라 NYO-USA의 단원들과 함께 한 길린슨 예술감독(맨 오른쪽). [사진 크리스 리(Chris Lee), 카네기홀]

 35년. 뉴욕 명문 공연장 카네기홀의 현재 수장인 클라이브 길린슨(73) 경영ㆍ예술 감독이 영국과 미국에서 예술 단체를 이끈 기간이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장으로 21년을 보냈고 카네기홀과의 인연은 14년째다. 그간 그의 성적표는 예술 경영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런던심포니의 첼로 단원이던 길린슨은 1984년 당시 오케스트라의 심각한 재정난으로 새로운 단장이 됐다. 이후 오케스트라를 새로운 단체로 만들어놨다. 스타 지휘자와 협연자를 잇달아 무대에 세우고, 교육 프로그램과 오케스트라의 자체 음반 레이블을 만들었다.

클라이브 길린슨 카네기홀 경영예술 감독 인터뷰

카네기홀에서도 성공적이다. 티켓 판매 수익은 지난해 1755만 달러(209억원)였다. 2014년 1437만 달러(171억원)에서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공연장 대표의 가장 큰 임무는 후원금 모금인데, 이 또한 지난해 4110만 달러(490억원)를 웃돌았다. 그 중 뉴욕 시 등 정부 지원금은 1%(43만 달러)다. 길린슨 감독이 영국과 미국에서 예술 단체의 대표적 수장으로 꼽히는 이유다.

2800석의 아이작 스턴홀에 앉은 길린슨 감독. [사진 토드 로젠버그(Todd Rosenberg), 카네기홀]

2800석의 아이작 스턴홀에 앉은 길린슨 감독. [사진 토드 로젠버그(Todd Rosenberg), 카네기홀]

18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만난 길린슨 감독은 “카네기홀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세계 일류였다. 하지만 그대로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나는 탐험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네기홀의 수익성을 높인 길린슨 대표가 처음부터 공들인 일은 돈 되는 사업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 대학 졸업생을 뽑아 훈련하고 직업을 찾아주는 펠로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졸업생은 뉴욕 내의 공립학교에 음악을 가르쳤다. 또 무료로 참여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 NYO-USA를 만들어 거장 지휘자와 짝지었다. 이밖에도 음악가들이 교도소 수감자들과 음악을 함께 만들고, 아기 엄마들이 아이들의 자장가를 짓도록 돕는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한 시즌(9월~이듬해 5월) 카네기홀이 기획한 공연은 170회지만, 사회 참여 프로그램 무대는 500여회에 이른다. 길린슨 대표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만 60만 명”이라고 했다.

런던에서도 정공법을 택했다. 청중에게 어려운 20세기 음악 위주로 공연하며 청중에 외면받기 시작한 런던 심포니를 맡고 한 첫 프로젝트가 구스타프 말러 페스티벌이었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께 한 ‘말러, 비엔나 그리고 20세기’ 페스티벌은 스타 연주자들을 초청해 줄지어 매진을 기록했다.

길린슨 감독은 “카네기홀을 맡았을 때도 ‘카네기홀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신 ‘음악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고 했다. “청중을 여행시키고 싶었다. 그저 그들이 좋아하는 곡을 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을 자극해 새로운 걸 해보고 싶게 만드는 게 음악의 역할이다.” 음악이 단지 더 많은 사람을 공연장에 끌고 오는 게 아니라 삶에 영향을 줘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40년 동안 첼리스트였다. 경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소속 오케스트라의 재정난을 돕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경영을 하게 된 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절실히 바라는 계획을 남들에게도 알리는 것이다.”

길린슨 감독의 철학은 공연장의 공연 계획 수립, 연주자 섭외, 이사회 설득, 후원금 모금 등 모든 곳에 반영됐다. 길린슨 감독은 “연주자와 무대를 계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연주자와 경영자가 서로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공유해야 한다. 지난 시즌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오랜 대화를 나눈 끝에 카네기에서 바이올린 듀오, 코미디 쇼, 독주 등을 다 했다. 그가 하고 싶던 것들을 이으면 연주자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청중은 거기에 반응한다. 이건 경영자인 내게도 매력적인 계획이다.”

길린슨 감독이 기금 모금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파디 케어(Fadi Kheir), 카네기홀]

길린슨 감독이 기금 모금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파디 케어(Fadi Kheir), 카네기홀]

후원금을 모으는 일도 마찬가지다. “경영을 시작하기 전 내가 절대 해보지 않았던 두 가지 일이 자금 조달, 연설이다. 그런데 연설도 대부분 돈을 모으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내가 하려는 일에 얼마나 절실한지가 후원금 모금의 성공을 결정한다. 비전에 대해 강력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길린슨 감독은 미국의 보수적 집단인 카네기홀 이사회와 함께 혁신적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기부자들과 예술가로 구성된 이사회는 사실상 그의 상관이다. 길린슨 감독은 “비결은 모든 일을 동시에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디어가 수없이 있었지만 각기 다른 시기에 시작했다. 또 아이디어를 어떻게 적용하고 돈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누가 어떤 질문을 해도 답할 수 있었다. 한 프로젝트를 잘 시작하고 나면 다음 프로젝트 때는 이사진이 나를 좀 더 믿어줬다. 이렇게 서서히 신뢰를 쌓았다.”

연주를 업으로 삼는 음악가는 카네기홀 공연을 꿈꾼다. 2016년 125주년을 맞은 이 공연장은 연주자의 지위를 증명하는 일종의 지표다. 그 공연장을 ‘탐험’이라는 키워드로 15년 이끌어온 길린슨 감독은 이제 영토를 늘리기 위해 나선다. 그는 “기존의 프로그램을 지렛대 삼아 다른 일로 넓히려 한다"면서 "더 많은 나라와 사람을 만나려 한다. 카네기홀이 만든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아시아 투어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 미국과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나라에 가서 서로 연결되는 것은 중요하다"며 "음악으로 사람들의 삶에 진정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덧붙였다.
뉴욕=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카네기홀=맨해튼 7번가와 56ㆍ57번가의 교차점에 위치한 공연장. 철강 사업을 시작해 부호가 된 앤드루 카네기가 1891년 세웠다. 아이작 스턴 홀, 잔켈 홀, 웨일 홀의 세 공연장이 있다. 개관 공연을 차이콥스키가 지휘했고 이후 라흐마니노프, 토스카니니, 레드제플린, 비틀즈 등 수많은 20ㆍ21세기 스타가 무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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