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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대통령 한마디에 올스톱한 한·일관계, 여당서 출구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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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징용’ 해법 내놓은 지일파 민주당 중진 강창일 의원

강창일 의원은 ’‘민간인 전문가로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해 징용 해법 찾자’는 중앙일보 한일비전포럼의 제안을 의미깊게 보았다. 내 해법도 여야가 초당적으로 뭉친 한일의원연맹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 상통한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강창일 의원은 ’‘민간인 전문가로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해 징용 해법 찾자’는 중앙일보 한일비전포럼의 제안을 의미깊게 보았다. 내 해법도 여야가 초당적으로 뭉친 한일의원연맹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 상통한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징용문제는 아직 재판(대법원 판결 이후 이어질 후속 재판들) 중인 사안 아닙니까? 끝이 난 게 아닌데 어떡합니까?”

“재판중” 일침, 이낙연·정의용 고심 #넉달 간 징용 해법 한치도 진전 못해 #‘일본 기업 배상 + 한국 위로’ 제시 #본지 대통령위원회 제안도 뜻깊어

여권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1월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 참모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그로부터 넉 달이 흐른 지난 2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사회 원로 오찬’에 참석한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일본과의 긴장을 해소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가 문 대통령으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가 걸려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여권 소식통의 전언이다. “징용문제는 지난해 11월까지 총리실에서 관할하다가 청와대 국가안보실로 넘어갔다. 당시 총리실은 일본 기업이 배상에 응하는 것을 전제로 나름의 타협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월 중순 문 대통령이 ‘재판 중인 사안’이라고 한마디 해버리니까 이낙연 총리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모두 깊은 고민에 빠지는 상황이 됐다. 그러니 실무자들도 힘이 빠졌다. 그 뒤 넉 달 넘게 올스톱 상황이 이어진 거다. 이대로 가면 6월 28~29일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회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 한·일관계는 재앙이다.”

보다 못한 집권당 중진 의원이 나섰다. 지일파 강창일 의원(4선·제주 갑)은 “현재 한·일관계에서 최대 걸림돌인 징용 문제를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톱다운’ 방식으로 풀어야만 한 달 뒤 오사카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이뤄질 수 있다”고 촉구했다. 이를 위해 ▶재판에서 피해 사실이 인정된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을 전제로 ▶우리 정부가 재단을 세워 여타 징용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강창일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1976년 한·일 국회에 나란히 설립돼 양국 간 위기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해온 한일의원연맹 회장이다. 연맹엔 양국 의원 180여명이 속해있다. 19, 20일 그를 만났다.

2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의원연맹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강창일 회장(왼쪽에서 셋째)과 일본측 카와무라 타케오 간사장(왼쪽에서 넷째). 변선구 기자

2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의원연맹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강창일 회장(왼쪽에서 셋째)과 일본측 카와무라 타케오 간사장(왼쪽에서 넷째). 변선구 기자

집권당 중진이 정부에 ‘해법’을 던지며 나선 이유는.
“한·일관계가 정말 심각하다. 내달 오사카에서 한·일정상회담이 무산되면 우리는 정말 ‘왕따’가 된다. 경제적으로도 서로 큰 피해를 본다. 일본도 급하다. 주한 일본 대사, 일본 의원들이 내게 ‘한국이 제스처를 보여주면 일본 기업들의 피해자 배상을 훼방 놓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가 꿈쩍 않는다. 시간이 없다. 6월 초까지는 징용문제가 풀려야 정상회담이 가능해진다.”
그동안에도 징용문제 해결에 개입했나.
“지난해 12월 방한한 일한의원연맹 누카가 후쿠시로 회장과 가와무라 다케오 간사장을 이낙연 총리가 초청해 나까지 4명이 총리 공관에서 식사했다. 이 총리가 ‘일본 기업이 기업대로 배상하면 우리도 나름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일본은 여기에 기대를 건 것 같다. 이런 가운데 내가 1월 초 일본을 찾게 됐다. 그러자 정의용 실장이 급히 날 만나 ‘애써주셔 고맙다. 잘 다녀오라’고 하더라. 징용문제가 정 실장에게 넘어온 뒤였다. ‘청와대가 문제를 풀 생각이 있구나’는 감이 들었다. 정 실장 밑 실무진에서 향후 징용 피해 재판을 청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숫자(800명 선)를 조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돌연 청와대 비서실장이 임종석에서 노영민으로 바뀐 데다 문 대통령이 1월 들어 ‘징용문제는 재판 중인 사안’ 이란 원론적 얘기를 해버리니 기류가 싹 바뀌더라.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청와대에서 아무 메시지가 없고 분위기가 싸늘했다. 정의용 실장에게 물어보니 ‘저도 죽겠습니다’만 연발하더라”
이후 어떻게 대응했나.
“나는 3·1절과 임정 수립일이 낀 3~4월까지는 냉각기를 가졌다가 5월 초까지는 풀려 했다. 그런데 정부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대통령이 일본에 안 가는 사태까지 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7일께 청와대 요로에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할 때’란 뜻을 전했다.”
정말 대통령이 일본에 안 갈 수도 있는 지경까지 간 건가.
“그랬다고 본다. 청와대에 ‘재판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10, 20년도 걸린다. 그사이 한·일관계는 어떡하냐’며 압박하니까 농담조이긴 하지만 ‘정 일본이 태도를 안 바꾸면 총리가 갈 수도 있지 않나’는 반응까지 나오더라. 그래서 ‘대통령이 안 가실 거면 안 간다고 얘기하라. 그래야 일본 의원들에게 설명해줄 것 아닌가’고 했다. 그런데 이틀 뒤 문 대통령이 TV 대담에서 ‘다음 달 오사카 G20 회의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혀 겨우 한숨 돌렸다. 오사카 G20은 판이 크다. 시진핑, 트럼프 다 온다. 우리만 대통령이 안 가기로 했으면 어쩔 뻔했나.”
징용문제에 대한 당신의 해법은.
“문 대통령의 3원칙이 있다. 징용은 우선 재판 중인 사안이라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거다. 두 번째는 역사와 정치는 분리하는 투트랙 원칙이고, 세 번째는 피해자 중심으로 가자는 거다. 옳다. 그런데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 이 기조 하에서 국익을 위해 한·일관계를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일본 기업은 피해자들에게 확실히 배상하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재판을 걸 능력이 없는 피해자들을 국민 보호 차원에서 재단을 만들어 위로해주자는 거다. 정부 추산으로는 징용 피해자들이 800여명에 이르나, 그들 중 상당수가 일본 기업에 재판을 걸기 어렵다. 인지대만 1000만원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승소 보장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정부가 재단을 만들어 도움을 주자는 거다.”
일본 기업이 책임질 일 아닌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전제 아래 우리도 할 일이 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식민지배가 불법 강점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에 피해당한 국민의 개인적 청구권을 보장하지 못했다. 여기엔 당시 우리 정부의 책임도 있다. 마침 당시 일본에서 받은 5억 달러를 바탕으로 정부가 만든 공기업 16개가 민영화되면서 나라가 번 돈이 18조원에 달한다. 원래는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돈 아닌가. 이중 극히 적은 액수만으로 재단을 만들어도 피해자들에 도움을 주기 충분하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
“이미 노무현 정부 때 구상됐다. 도로공사가 고속도로 통행료에서 얼마, 포스코가 수익에서 얼마 이런 식으로 낼 의사가 있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독일도 전례가 있다. 정부와 독일 기업들이 6조5000억원을 모아 나치 피해자들에게 5조3000억원을 지불했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도 가능하다. 재단 설립은 특별법이 필요한데 야당도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라 찬성할 게 분명하다. 정부만 결단 내리면 된다.”
문 대통령이 일본에 워낙 강경한데.
“대통령이 일본에 화가 많이 나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우리는 북한 비핵화 관련 정보를 일본과 공유하며 예의를 다 지켜줬다. 지난해 9월 서훈 국정원장이 방일해 우리 특사단의 방북 결과를 알려준 게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들의 정보를 하나도 안 줬다. 또 지난해 유럽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두 번 조우했다. 정의용 실장이 미리 문 대통령에게 ‘아베 만나면 먼저 회담하자고 제의하라’고 조언했고 문 대통령은 이를 따랐다. 그런데 아베는 두 번 다 모른 척 해버렸다. 정 실장만 쥐구멍 찾는 신세가 됐다.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은 김정은을 만날 때마다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과 북·일 수교를 촉구했다. 아베 총리가 자신에게 부탁한 내용을 그대로 들어준 거다. 그랬는데도 아베가 한국에 강경책으로 일관하니 신뢰가 가겠는가" 
그래도 문 대통령의 대일 인식이 너무 원칙적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은데.
“일본 행태가 불신을 초래할 수 밖에 없지만, 대통령은 국익 차원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에 대일 전략가가 있어야 하는데 꾀부리는 참모들만 있는 건 아닌지도 걱정스럽다.”
경기도의회가 학교 기자재에 ‘일본 전범 기업 제품’ 딱지를 붙이는 조례 입법을 추진한 건 어떻게 보나.
“내가 그때 도 의장에 전화했다. ‘한·일관계 악화시키지 말라,  인기영합주의 정치 쇼 하지 말라, 크게 내다봐라’고 강하게 말렸다. 민노총이 부산에 강제징용 노동자 상을 세운다고 했을 때도 ‘한·일관계 정상화해야 하는데 (일본) 자극 말라, 예의가 아니지 않으냐’고 말렸다. 청와대, 외교부도 (말리느라) 애썼다.”

강찬호 논설위원, 정리=이정원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