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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독재자의 후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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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팀 차장

김승현 정치팀 차장

익숙한 단어도 어원(語源)을 알고 놀랄 때가 있다. 우리말 단어에 숨어있는 한자, 영어 속 라틴어 어근 등이 품은 뜻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모호한 개념이 명확해지고 깨달음은 커진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연마되기까지 오랜 퇴적과 침식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최근 여야 정치권이 공격 무기로 쓰는 ‘독재자’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다. 한자어 ‘독재자(獨裁者)’의 ‘마를 재(裁)’는 ‘옷을 마르다(치수에 맞게 자르다)’, ‘(글을) 짓다’, ‘결정하다’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재봉사, 재판관에도 이 한자가 쓰인다. 그렇다면 독재자는 ‘혼자 맘대로 옷감을 자르듯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으로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대중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결과에 이르기 전 단계에 ‘혼자 판단하는’ 습성을 강조한 말이어서다.

영어의 독재자 ‘딕테이터(dictator)’도 ‘받아쓰게 하다’, ‘(기분 나쁘게) 명령하다’라는 뜻의 동사 ‘dictate’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어근으로는 ‘dict(말)+ate(행동)’로 구성된다. ‘말로 지시해서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의미대로면 지금 우리의 일상 곳곳에 독재자가 포진해 있을 가능성은 커진다.

폭군의 의미가 있는 독재자 ‘타이런트(tyrant)’는 지구 최강의 공룡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의 이름 앞부분과 같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공룡 좋아하는 사내아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폭군을 연호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자유한국당을 겨냥해 ‘독재자의 후예’라는 말을 써서 논란이다. ‘좌파독재’라는 한국당 발언을 갚아 준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기왕 공방을 벌이는 김에 그 단어가 내포한 습성이 몸에 밴 건 아닌지 여야 모두 잘 살펴봤으면 한다.

김승현 정치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