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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이제 진대제는 "돈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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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 도곡동엔 카이스트(KAIST) 학생들도 잘 모르는 캠퍼스가 하나 더 있다. 지식재산대학원 등이 입주한 도곡 캠퍼스다. 때는 2006년. 삼성전자 사장과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며 '반도체 신화의 주역' '노무현 정부 최장수 장관'같은 현란한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진대제(67, 당시 54세)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경기도지사 낙선 후 이곳에서 미래를 구상 중이었다. 대학 총장이나 회사 중역으로 갈 수 있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대학 기부금 모금하러 다니는 게 보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통부장관 시절인 2004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와 만난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회장. 사모펀드 초창기엔 투자자를 모으려면 이 정도 급의 '빅 네임'이 필요했다. [중앙포토]

정통부장관 시절인 2004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와 만난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회장. 사모펀드 초창기엔 투자자를 모으려면 이 정도 급의 '빅 네임'이 필요했다. [중앙포토]

바로 그때 인텔연구소장을 지낸 이강석, 골드먼삭스 등 투자은행(IB) 출신 최승우 등이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이제 막 한국에 도입(2004년)된 바이아웃(기업인수 후 매각)을 전략으로 삼는 경영참여형(GP) 사모펀드를 해보자는 얘기였다. 내로라하는 업계 전문가들이었지만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개념도 생소한 사모펀드에 돈 넣을 투자자를 모을 수 있는 진대제 같은 '빅 네임'이었다. 마침 이 거물도 제대로 된 투자서비스가 없어 중소기업이나 벤처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하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IT 전문 사모펀드 설립에 손을 잡았다.

도입 15년만에 급성장한 사모펀드 #초기 10억 투자도 어려웠지만 #이젠 설립 전부터 글로벌 투자 #돈 아닌 탄탄한 산업이 기본 #최고 스펙 '인재 블랙홀'은 여전

 2006년 스카이레이크 창립식 모습. 인텔연구소 출신 이강석 부사장과 54세에 사업을 시작한 진대제 회장, IB업계에서 온 최승우 부사장, 박상일 부사장(앞줄 왼쪽부터). 뒷줄은 홍주일 부장, 김영민 상무, 김창근 고문, 김앤장 출신 이응진 부사장, 원재준 상무. [사진 스카이레이크]

2006년 스카이레이크 창립식 모습. 인텔연구소 출신 이강석 부사장과 54세에 사업을 시작한 진대제 회장, IB업계에서 온 최승우 부사장, 박상일 부사장(앞줄 왼쪽부터). 뒷줄은 홍주일 부장, 김영민 상무, 김창근 고문, 김앤장 출신 이응진 부사장, 원재준 상무. [사진 스카이레이크]

그렇게 탄생한 게 한국 1세대 경영참여형 사모펀드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다. 칼라일 아시아 회장을 지낸 기업 인수합병(M&A) 업계 거물 김병주의 MBK파트너스나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금융분석원장을 지낸 변양호 등이 세운 보고펀드(현 VIG 파트너스)보다 1년 늦긴 했지만 이때 역시 사모펀드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진 전 장관의 사모펀드 설립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주변에선 왜 이런 일에 뛰어드느냐고 할 만큼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리고 2019년. 카이스트 도곡 캠퍼스 바로 옆 조그마한 대동빌딩 2층 사무실 한 칸에서 시작한 스카이레이크가 도곡 캠퍼스가 저 멀리 보이는 5층짜리 사옥으로 옮기고 직원 7명에서 6000여 명(인수기업 직원 포함)으로 는 것만큼이나 극적으로, 사모펀드는 도입 15년 만에 눈부신 성장을 했다.

급작스럽게 오너 세대교체가 이뤄진 한진 지주사 한진칼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KCGI(일명 강성부 펀드)나 롯데카드 인수전에서 하나금융을 제치고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한앤컴퍼니 등만 봐도 사모펀드의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본시장 큰손인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KIC)도 사모펀드 투자 확대를 결정했다.

이러니 한국 경제의 미래가 어둡다는 걱정 속에서도 사모펀드 업계만은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2014년 말 162개사였던 경영참여형(GP) 사모펀드가 불과 3~4년 만에 232개사(2018년 6월)로 크게 늘어난 배경이다. 또 아시아 1위로 성장한 MBK파트너스 등 기존의 대형사가 존재감을 과시하며 인재를 끌어들이는 한편 젊은 전문가들이 속속 겁 없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업계에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요즘 젊은 컨설턴트는 대기업이 아닌 사모펀드행을 가장 원한다"고 말했다.

MIT 경영대학원(MBA)을 마치고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전략 컨설턴트를 거쳐 CJ ENM 글로벌 사업팀장을 지낸 박정무(42) 대표가 설립 준비 중인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등 라이프스타일을 전문으로 하는 ATU파트너스(이하 ATU)도 그중 하나다. 박 대표는 CJ ENM과 YG 등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MBA·회계사·컨설턴트 출신 인재들을 어렵지 않게 끌어모았다. 진대제 같은 '빅 네임'은커녕 CJ ENM이나 맥킨지 같은 간판도 없이 테헤란로의 위워크(공유 오피스) 강남 1호점 14층에서 단출하게 시작하지만 이런 조건은 인재 영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ATU파트너스는 진대제 같은 '빅 네임' 없이 테헤란로의 위워크(공유 오피스) 강남 1호점 14층에서 단출하게 시작하지만 인재 영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요즘 사모펀드 업계는 간판보다 전문성을 더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임현동 기자

ATU파트너스는 진대제 같은 '빅 네임' 없이 테헤란로의 위워크(공유 오피스) 강남 1호점 14층에서 단출하게 시작하지만 인재 영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요즘 사모펀드 업계는 간판보다 전문성을 더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임현동 기자

제조업에서부터 떠오르는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산업현장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 사모펀드의 모습은 도곡동 스카이레이크 사옥, 그리고 테헤란로 ATU사무실에서 만난 진 회장과 박 대표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보인다.

 사모펀드 1세대 진제대 회장과 이제 막 뛰어든 박정무 대표. [중앙포토] 임현동 기자

사모펀드 1세대 진제대 회장과 이제 막 뛰어든 박정무 대표. [중앙포토] 임현동 기자

스카이레이크와 ATU의 초창기 겉모습은 비슷하다. 사무실 한 칸이 전부다. 그런데 투자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진 회장(당시 대표)은 1호 펀드 300억 원을 채우느라 발품을 팔아야 했다. 직접 치열하게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기도 했지만 알고 지내던 중견 기업 회장들을 찾아가 10억 원에서 20억 원씩 출자를 부탁했다. 투덜대면서도 돈을 냈다. 투자라기보다는 민원해결 차원이었다. 근거로 삼을만한 트랙 레코드(수익률)가 없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투자자에게 신뢰를 주느라 1호 300억 원, 2호 1000억 원에 자기 돈 10%씩을 넣었다. 아무리 삼성전자 사장 출신으로 돈을 좀 모았다지만 미래가 불확실한 투자에 각각 30억, 100억 원을 쏟아붓는 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진 회장은 "당시는 창업주든 2세든 회사 파는 걸 죄악시하고 실패로 여기던 시절이라 기업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생각하기는커녕 매물 자체가 없었다"며 "게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2010년 무렵엔 연 10억~20억 원씩 적자를 보면서 버텼다"고 했다.
2013년 삼성전자 후배인 김재욱 반도체총괄 전 사장(현 BNW인베스트먼트 회장)이 사모펀드 설립 조언을 구하러 찾아왔을 때 대뜸 "당신 돈 있느냐"고 물었던 이유다. 이미 성공 사례가 나온 이후였는데도 그랬다. 2012년, 진대제 1호 펀드가 투자한 얼굴인식 기술 관련 IT벤처 올라웍스가 인텔에 팔리면서 원금은 물론 60% 이상의 수익을 내자 투자자들은 "까먹는 돈으로 생각했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지금 스카이레이크는 국민연금에서만 7500억 원을 받아 굴린다.

반면 ATU는 아직 GP인가도 받기 전인데 벌써 K팝이나 K뷰티, E스포츠 등 콘텐트에 관심을 갖는 유수의 글로벌 톱 사모펀드 몇 곳으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았다. 각각 100억~500억 원으로 규모가 적지만 니치 산업(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전문가를 확보한 덕분이다.

위워크에 터를 잡은 ATU파트너스 직원들이 공용 라운지에서 얘기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무 대표다. 임현동 기자

위워크에 터를 잡은 ATU파트너스 직원들이 공용 라운지에서 얘기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무 대표다. 임현동 기자

박 대표가 대형 사모펀드 입사 대신 라이프스타일 전문 사모펀드를 직접 설립한 이유도 여기 있다. 박 대표는 "산업 잠재력은 큰데 아직은 규모가 작고 비즈니스 전문가도 없다 보니 외국계 사모펀드가 시장을 장악하기 전에 뛰어든 것"이라며 "성공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엔 돈만 되면 뭐든 사고팔았다면 이젠 섹터별 전문성을 갖고 기업과 함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때마침 진 회장이 초창기 펀드의 10%를 책임진 것과 달리 GP투자분으로 2%만 넣어도 신뢰 문제가 전혀 없을 만큼 시장도 성숙했다.

기업 상속 이슈 등 중형 매물이 많아진 데다 이처럼 전문화된 시장이 열리는 시기이다 보니 기존의 투자은행(IB)이나 컨설팅업계뿐 아니라 대형 사모펀드에서 나와 업계 전문가와 손을 잡고 직접 차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엔터산업처럼 점점 규모는 커지는 데 시스템이 덜 고도화 되어 있어 기업 가치를 상승시킬 여지가 있는 산업 분야에서 기회를 노린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산업에 대한 전문성은 필수"라고 했다. 2018년 7월에 나온 맥킨지의 사모펀드 보고서도 "2013년 이후 코스피지수가 1~3%의 저조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사모펀드는 지금까지 평균 20%가 넘는 내부수익률을 올리며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했다"며 "이젠 바이아웃을 넘어 시너지를 올리는 전략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 최고 인재들이 모인 사모펀드 업계는 그들의 주장대로 기업을 투명하게 만들어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기여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일각의 비판처럼 그들만의 돌려막기식으로 기업 가치를 부풀리기해서 자기들 주머니만 채우고 있는 걸까. 이 답은 사모펀드가 아니라 한국 산업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진 회장은 "싸고 비싼 매물은 늘 있는 것"이라며 "최근 2~3년 새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나빠진 게 걱정"이라고 했다. 기업을 사들일 땐 최소 5년 후를 내다봐야 하는데 누가 살까 싶을 정도로 역량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엔터산업은 거꾸로다. 박 대표는 "매수자가 늘어나고 영역도 글로벌로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
정반대의 얘기 같지만 사실은 같은 얘기다. "산업 경쟁력이 있어야 사모펀드도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지 돈 있다고 산업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는 진 회장 말처럼 탄탄한 산업 기반이 사모펀드 성장, 아니 한국 경제 경쟁력의 열쇠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