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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죽자더니…” 94세 할아버지의 아내 전상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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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70년을 함께 한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뒤 그리움을 한시로 달래는 정충석옹.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70년을 함께 한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뒤 그리움을 한시로 달래는 정충석옹.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밤중 고요한 달이 창을 비추니 적막하다/풍류스런 정회와 시다운 생각은 사라졌다/가인은 저세상 가고 늙은 홀아비는 병들고/한결같은 독수공방 스며드는 상념이 많다” (잠을 못 이뤄 한 수 짓다).

3년 전 떠난 아내에 한시집 바쳐 #“70년간 따듯한 말 한마디 못해”

70년 동안 인연을 함께한 부부가 있다. 아내는 3년 전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남편은 아내가 그리워질 때마다 한시를 한 수 한 수 짓고, 그 시편을 묶어 책을 냈다. 『옥헌강선조여사삼년상시집』(도서출판 무공·비매품)이다.

올해 아흔넷의 정충석옹 얘기다. 지난 14일 만난 정옹은 “아내가 생각날 때마다 쓴 한시 약 50편을 모았다”며 “아내의 삼년상을 끝낸 기념으로 아내를 위해 쓴 시들을 모아 책을 냈다”고 말했다.

정옹은 22살이던 1947년 경남 함양에서 아내 강선조(1928~2017)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아내는 19살이었다. 고향에 계신 어른들이 맺어준 사이였다. 정옹은 “결혼식 날 아내를 처음 봤는데 첫눈에 반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른들이 정해준 일이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내 역시 남편이 첫눈에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내는 지인들에게 “남편이 키가 작고 왜소한데 저렇게 약해 보이는 사람과 어떻게 평생 사나 싶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부부는 세월을 함께하며 단단한 사이가 됐다. 정옹은 “살다 보니 아내가 나의 하나뿐인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내밖에 없다고 여겨졌다”고 했다.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남편은 일평생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정옹은 “나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겉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결혼 직후 남편은 서울대 생물교육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재학 중 6·25가 일어났고 남편은 참전용사로 싸웠다.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표창도 받았지만, 이 모든 게 아내에겐 눈물 젖은 세월이었다. 이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남편은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옹은 평생 농협에서 일했는데, 월급을 받으면 봉투를 방바닥에 던져 놓고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아내는 집안일까지 도맡으며 5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가 아내의 소중함을 깨달은 건 어리석게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외출했다가 어두컴컴한 빈집에 들어오면 아내의 부재가 더욱 크게만 느껴졌다.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홀로 한시를 지으며 적적함을 달랬다. 정옹은 “아내가 참 고생이 많았다. 좀 더 잘해줘야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오는 21일은 부부의 날. 아내를 다시 만나면 하고픈 말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한날한시에 같이 죽자고 약속했는데 왜 먼저 갔는지 묻고 싶다”며 “고맙고 고생 참 많이 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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