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건강한 가족] 뇌전증 환자도 국가 관리, 떳떳이 치료받게 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5면

전문의 칼럼 세브란스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김흥동 교수 

세브란스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김흥동 교수

세브란스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김흥동 교수

과거에 간질로 불리던 뇌전증의 유병률은 전체 인구의 0.5~1%다. 국내에서는 최소 30만 명이 앓고 있는 비교적 흔한 질환이다. 뇌전증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갑작스러운 의식 소실 또는 경련이 반복되는 병이다.

한 번의 발작이 대략 2분, 잘 조절되지 않는 20~30%에 해당하는 경우라도 1년에 20분을 넘기지 않는 발작 때문에 결혼과 취업에서의 차별, 주변의 차가운 시선 등에 대한 부담으로 뇌전증 환자들은 병을 숨긴다. 치매·뇌졸중 다음으로 흔한 뇌 질환임에도 뇌전증은 대한민국에서 환자가 병을 숨기고 숨죽이며 살아가는 유일한 질환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의 뇌전증 환자는 발작이 없는 시기엔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 발작을 억제하는 항경련 약물 투여나 증상을 유발하는 뇌의 병변을 제거하는 수술로 치료가 가능하다. 최근에는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에 직접 작용해 발작을 억제하는 새로운 기전의 약물이 개발되는 등 치료제와 치료 방법이 발전했다. 이를 통해 환자의 약 70%는 발작 없이 생활하고 나머지 20~30%의 환자도 식이 치료와 시술, 수술 등을 병행하면 최대한 발작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런데도 주변에 이 병을 알리기가 두려워서 병명을 숨기고 치료 시기를 놓쳐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는 환자를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뇌전증을 국가가 관리해야 할 중요한 질환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뇌전증은 선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부끄럽게 정부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일반인의 무지함, 병을 드러내기 어렵게 하는 사회 분위기,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으로 뇌전증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사회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유일한 질환으로 남게 됐다. 이런 상황 때문에 뇌전증 진단 이후에 경제적 취약계층으로 전락하거나 가정 붕괴로 이어지는 경우를 진료 현장에서 흔히 목격한다.

이제는 뇌전증도 치매 못지않게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뇌전증 환우들이 다른 요인에 의해 상처받지 않고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동참하길 기대한다. 이들이 병을 당당하게 드러내 치료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