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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할퀸 곳에 ‘핑크 텐트’…브래드 피트는 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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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호 18면

지구촌 대형 재해 복구, 성공과 실패

“산불 이후 바뀐 것도 나아진 것도 없습니다. 이재민 중 젊은 사람이 70대입니다. 이분들이 객사하지 않도록, 임시주택에서 삶을 마감하지 않도록 빠른 복구를 바랄 뿐입니다.”

동해안 산불 한 달, 현장서 배우다 #살 곳 없는데 구호 물품만 답지 #복구비 지원 더뎌 엇박자 행정 #고베 대지진 이후 전문가팀 활약 #관광도시 변신, 재해 복구 한 획 #‘카트리나’ 뉴올리언스 찾은 피트 #이벤트로 주택 지을 기부 이끌어내

15일 수화기 너머 장인환(48) 용촌1리 마을대책위원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지쳐가는 것, 무기력해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강원도 동해안 산불 한 달여, 매일 마주하는 폐허는 이재민을 지치게 하고 있다.

어제 불난 듯 마을엔 아직도 탄내 진동

건축가들이 산불로 초토화가 된 고성군의 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돕고 싶지만 창구를 찾지 못해 일단 현장으로 온 이들은 ’체계적인 복구 매뉴얼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참여를 독려했다. [한은화 기자]

건축가들이 산불로 초토화가 된 고성군의 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돕고 싶지만 창구를 찾지 못해 일단 현장으로 온 이들은 ’체계적인 복구 매뉴얼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참여를 독려했다. [한은화 기자]

지난 3일 산불로 전파된 그의 집이 있는 고성군 토성면 용촌1리를 방문했을 때, 마을은 마치 어제 불이 난 듯 탄내가 가득했다. 다행히 타지 않은 마을회관에서 동네 주민들은 머물고 있었다. 주민 이수수(75)씨는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면 냄새가 지독하다”며 “집이 반파됐고 수리비 견적만 5500만원인데 전파 기준으로 국민 성금 및 각종 정부 지원금 합치면 6000만원밖에 안된다고 해 막막하다”고 말했다.

이날 대책반이 꾸려진 고성군 토성면 행정복지센터 2층은 성금 전달식으로 분주했다. 고성군 관계자는 “성품은 시가 직접 받지만, 성금은 모두 재해구호협회에 기탁해 배분하게 된다”고 말했다.

후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산불 직후 구호 물품으로 헌 옷이 잔뜩 왔던 것처럼 도움의 손길도 엇박자가 나고 있다. 이재민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소통 채널이 부족하다. 현장과 행정의 온도 차도 크다. 주민들은 "국민 성금액으로 집이 전파되면 3000만원, 반파 시 1500만원만 받았을 뿐 정부 지원을 받은 게 없다"고 말했다. 강원도 측은 “일차적으로 국민 성금이 나갔고, 정부 차원의 복구비는 복구가 시작돼야 지원된다.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주민들은 살 곳을 찾아 마을을 떠나고 있다. 고성·속초·강릉·동해 4개 시·군의 이재민 중 388가구 875명이 현재 임시주거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머지 153가구 340명은 친인척 집에 머물고 있다. 298가구가 농사 등을 위해 살던 곳에 임시 조립주택을 짓길 희망했으나, 현재 8가구에만 보급된 상태다. 장인환씨는 “처음에는 마을회관에 있다가 불탄 집 보는 게 마음 아파 공무원 연수원 시설로 들어가는 주민들이 늘었지만, 여름철까지 계속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집’이다. 완전히 복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머물 임시주택도 필요하다. 이날 다수의 건축가와 현장 동행했다. 앞장서서 돕고 싶지만, 소통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김인철 부산시 총괄 건축가, 천근우 한국건축가협회건축봉사위원장, 김민호 변호사를 비롯해 서상하·차성민·전성은·남기봉 건축가가 함께 현장을 둘러봤다.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체계적인 복구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목소리가 모였다.

김인철 건축가는 “2017년 지진 이후 아직도 체육관 대피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포항의 이재민과 이번 동해안 산불 사태를 보면서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재난이고, 재난을 기회로 만들 수 있게 전문가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대형 재난을 겪은 해외의 복구 현장에서 배울 점이 많다. 재해 지역의 복구 절차는 통상 3단계로 나뉜다. 천근우 건축가는 “1단계로 학교와 마을회관 같은 임시 대피처로 피신하고, 2단계로 원래 마을과 집이 복구되기까지 6개월~3년간 머물 수 있는 임시주거시설을 짓고, 마지막이 마스터플랜을 통해 집과 마을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1995년 고베 대지진을 기점으로 재해 복구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사망자만 6000명이 넘고, 이재민만 20만 명에 달했던 대형 재해였던 만큼 모두가 뜻을 모아 제대로 된 복구 매뉴얼을 만들었다. 현장과 행정의 온도 차를 메꾼 것은 민간 전문가팀이었다. 도시계획·건축·회계사·변호사·부동산 중개업 관계자 등 50여 명이 팀을 꾸려 ‘선 조치 후 계획’을 모토로 빠르게 복구해나갔다. 공공은 특별법을 공포해 전문가팀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 주택 복구뿐 아니라 도시 마스터플랜도 새롭게 한 결과, 지진으로 망가졌던 도시는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다.

인도네시아 임시주택은 이재민들 외면

허리케인이 쓸고 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재건을 위한 ‘핑크 텐트’ 프로젝트를 추진한 배우 브래드 피트. [중앙포토]

허리케인이 쓸고 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재건을 위한 ‘핑크 텐트’ 프로젝트를 추진한 배우 브래드 피트. [중앙포토]

재해 복구를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슈 지속성’도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가장 좋은 사례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미국 뉴올리언스의 복구 현장을 꼽았다. 배우 브래드 피트가 그 중심에 있었다. 2007년 재해 현장을 찾은 그는 참사 당시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 ‘메이크 잇 라이트’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150채의 친환경 주택을 시범적으로 짓는다는 목표였다. 집을 짓기까지 화제를 끌고 나가기 위해 기부를 받을 때마다 폐허가 된 현장에 오브제로써 ‘핑크 텐트’를 설치해 나갔다. 마치 연말이면 서울 시청 광장에 ‘사랑의 온도탑’이 설치되는 것처럼 말이다. 서상하 건축가(키오스크건축 대표)는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당장에 효과가 나는 프로젝트도 함께 끌고 가야 하는데 브래드 피트의 ‘핑크 텐트’ 전략은 주효했다”며 “미국민 나아가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고, 이재민도 그 현장을 즐기게 됐다”고 전했다.

임시주거지에 대한 고민도 많다. 2004년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쓰나미 현장이 반면교사가 됐다. 당시 중국·일본·대만 등에서 앞다퉈 임시주택을 지었으나, 주민들은 그 집에서 살기를 거부했다. 살던 마을에서 외떨어진 곳인 데다가, 지역 기후에 맞지 않은 건축물을 지은 탓이었다. 천근우 건축가는 “열대성 기후인 인도네시아는 집의 바닥이 지면으로부터 높게 설치된 ‘고상주거’여야 하는데, 현지 상황과 맞지 않게 바닥에 딱 붙여서 임시주택을 짓는 바람에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고 설명했다.

임시주거지도 휴양시설 재활용 가능

터키의 ‘디자인노비스’가 개발 한 구호 주택. [사진 디자인노비스 텐터티브]

터키의 ‘디자인노비스’가 개발 한 구호 주택. [사진 디자인노비스 텐터티브]

지난 3월 개관한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재난에 대비한 임시주거지를 전시하고 있다. 터키 국적의 디자인 팀 ‘디자인노비스’가 개발한 텐트형식의 구호 주택은 트럭 한 대로 24개 텐트를 재난 현장으로 수송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는 2012년 쓰나미에 휩쓸린 일본 미야기현 오나가와쵸의 야구장에 컨테이너를 쌓아 3층짜리 189가구가 사는 가설주택을 만들었다. 재난 지역이 연안 지역이라 평지가 드문 탓에 낸 아이디어였다.

이 주택은 접어서 트럭으로 운반할 수 있다. [사진 디자인노비스 텐터티브]

이 주택은 접어서 트럭으로 운반할 수 있다. [사진 디자인노비스 텐터티브]

임시주거지를 재활용해 쓰고 있는 국내 사례도 있다. 재해용은 아니었지만, 평창올림픽 때 기자단 숙소로 썼던 이동형 모듈러 건축물을 직원 휴양시설로 재활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예시로 거론됐다.

무엇보다 장기적인 계획이 중요하다.  중국은 2008년 쓰촨성 지진 이후 최대 피해지역이었던 베이촨현을 2020년까지 새 도시로 완전히 복구한다는 계획을 잡고 현재도 추진하고 있다. 도시 양 끝쪽은 재난을 대비해 커다란 녹지지역 으로 계획했다. 김인철 건축가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함께 복구해 나가자. 재난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성=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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