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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쇼팽과 '왕족' 상드… 묘하게 엇갈린 과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4)

쇼팽(Frederic Chopin). 1873. P. Schick. [사진 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도메인)]

쇼팽(Frederic Chopin). 1873. P. Schick. [사진 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도메인)]

쇼팽은 그의 일생의 여인 상드와 너무나도 달랐다.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다. 두 사람이 파리로 온 것은 각각 1830년 11월(상드)과 1831년 9월(쇼팽)로 비슷했다. 둘 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자리 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자주 비교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출신 배경과 서로가 만나는 시점까지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마치 조작된 것처럼 절묘하게 엇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란드인인 쇼팽의 선조는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신분상으로 낮은 계층인 농민이었다. 쇼팽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북동부의 시골마을에서 포도농사와 마차바퀴 제작을 했었다. 쇼팽의 아버지는 맨손으로 폴란드로 건너가서 어려운 가운데 노력을 동반한 착실한 삶으로 중산층으로 올라섰고 지식인으로 대우받았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는 쇼팽에게 삶의 자세에 있어서 좋은 귀감이 되었다.

프랑스인인 상드의 선조는 폴란드에서 정점을 맞았다. 폴란드에 접한 독일 동부의 작센(영어명, Saxony) 출신인 그녀의 선조는 1697년 폴란드의 왕이 되었다. 상드는 폴란드의 왕 아우구스투스 2세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왕족의 후손임을 당당히 내세웠다. 아우구스투스 2세의 아들인 상드의 외증조부는 프랑스로 와서 대원수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선조 개개인이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모범적이고 바른길을 통해 상드에게 그 피가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외증조부는 왕의 혼외자식이었다. 그 외증조부와 비천한 무희(이것은 실상에 비하면 고상한 표현이다) 사이에서 태어난, 역시 혼외자식이었던 상드의 할머니는 극적인 반전으로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구조되는 삶의 반전을 겪었다. 상드 또한 선조의 피를 비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통해 이어받았다.

상드 쪽의 혈연의 대물림은 아슬아슬했다. 상드의 할머니는 자신의 출신 배경에서 천한 부분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상드의 아버지도 여러 명의 혼외자식을 두었다. 그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35. Francois Theodore Rochard. [사진 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도메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35. Francois Theodore Rochard. [사진 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도메인)]

쇼팽과 상드의 선조에 있어서 이주의 방향이 한 쪽은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다른 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방향이 엇갈린다. 그리고 출신 성분도 기준점에서 농민과 왕족,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옛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었다. 상드는 어릴 적 할머니에게, 프랑스의 왕족과 연결되는 혈연관계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쇼팽은 자신의 가계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거의 듣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몸에 프랑스인의 핏줄이 연결되어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웬일인지 쇼팽의 아버지는 폴란드로 이주해 온 이후 초기에 주고받은 몇 통의 편지를 제외하고 고향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도 두 사람이 엇갈렸는데 쇼팽은 폴란드의 시골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나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그는 바르샤바의 옛 궁전에서 자라면서 아버지의 지도아래 좋은 정규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같이 교육받고 어울린 친구들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어울리지 않는 귀족가문의 아이들이었다. 어릴 적 쇼팽은 시골의 농민들을 접촉하기도 했지만 그는 마치 다른 종류의 사람들인 듯 그들을 대했다.

이에 반해 상드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자란 곳은 프랑스 중부의 시골 노앙이었다. 그 곳에서 할머니의 감독아래 이루어진 사교육은 질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같이 뛰어 논 아이들이 농민의 자식들이었고 그 곳의 숲과 들이 그녀의 어린 시절 주요 배경이었다는 것이다.

서로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이 시골과 수도로 엇갈렸고 출신 성분에 맞지 않게 어울려 자란 친구들도 다르다. 뛰어 놀던 곳도 각각 궁전과 시골의 들판으로 대비된다. 두 사람에게서 비슷한 것을 찾는다면 토속 원주민들에게서 얻은 작품의 소재 정도가 포함될 듯하다. 쇼팽이 가장 많이 작곡한 곡의 장르는 폴란드 민속음악에 기초한 마주르카였다. 상드의 전원소설의 주제와 내용은 그가 몸소 겪은 노앙의 주민들과 그들의 삶에서 얻은 것이었다.

쇼팽에게는 완벽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었다. 부모 양친은 그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주었고 누나와 여동생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 여동생이 어린 쇼팽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쇼팽의 가정은 유대감과 애정으로 결합된 이상적인 것이었고 자라나는 동안 가정에서 부족함을 느꼈다거나, 혹은 그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방황을 겪은 적은 없었다.

쇼팽과 상드(Chopin and George Sand). 외젠 들라크루아. 스케치(왼쪽)과 완성(오른쪽)본(1838).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도메인)]

쇼팽과 상드(Chopin and George Sand). 외젠 들라크루아. 스케치(왼쪽)과 완성(오른쪽)본(1838).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 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도메인)]

반면 상드의 가정은 완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할머니와의 갈등으로 상드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툼과 갈등을 집 안에서 몸소 겪었다. 자신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재산을 노리고 온 어머니와 갈등이 있었다. 상드가 결혼을 서두른 데는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다.

완벽하지 못한 가정은 어린 상드에게 상처가 되었다. 어머니 애정의 결핍으로 그녀는 한때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성인이 된 상드가 연하의 남성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에는 어머니의 애정의 결핍이 역으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드가 잘 자라난 것에는 할머니의 기여가 컸다.

성장배경 탓이었는지 쇼팽은 귀족적 용모에 점잖고 우아한 생활을 지향했다. 반대로 상드는 자유롭고 실용적인 생활을 추구했다. 상드는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지만 쇼팽은 전통, 관습, 예의범절을 중시했다. 쇼팽은 변화를 어려워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힘겨워했다. 이미 가지고 있고 경험했던 것이 완벽하고 좋은데 굳이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꿀 유인은 적었다. 그러나 좋은 환경을 갖춘 온실에서 자란 식물은 거친 야생에서 자라나기 힘들다.

이와 달리 상드는 새로운 세상이나,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사상에 거부감도 없었고 변화에 두려움도 없었다. 그녀는 도전적이었고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이었고 관대했다. 어느 곳에 있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 또한 컸다. 상드의 화려한 바람기는 이러한 그녀의 성격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다음은 상드의 화려한 남성편력에 대한 이야기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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