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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연루에 미세먼지 누명까지…런던 아이스크림 트럭에 무슨 일이

중앙일보

입력

 행복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마법 주문. (BBC)

 아이스크림 트럭 벨 소리는 곧 영국의 여름 소리다. (가디언)

영국에서는 여름철 각양각색의 아이스크림 트럭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영업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lovesalcombe, @parked_in_the_cotswolds (사진 2개), @av_on_air 계정에 올라온 트럭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영국에서는 여름철 각양각색의 아이스크림 트럭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영업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lovesalcombe, @parked_in_the_cotswolds (사진 2개), @av_on_air 계정에 올라온 트럭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1950년대부터 런던 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아이스크림 트럭이 존폐 위기에 놓였다. 급격한 수요 감소와 맞물려 역기능이 차츰 부각돼서다. 소음과 교통 체증, 마약 거래 등을 유발한다는 비난을 받던 아이스크림 트럭은 최근 미세먼지 주범으로도 지목됐다. 알록달록한 외관에 특유의 차임벨 소리로 잘 알려진 런던 아이스크림 트럭에 얽힌 사연을 알아봤다.

‘아이스크림 거래 금지’ 표지판 등장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시의회가 아이스크림 트럭 공회전 금지 단속에 나서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트럭이 한 곳에 멈춰 서서 대기오염 물질을 내뿜는다는 이유에서다. 의회 대변인은 “엔진에 시동을 켜고 정차하면 이산화질소, 그을음 같은 유해 화학물질들이 배출된다”며 “공회전 차량이 학교 주변 등 일부 공공장소에 정차하는 것을 금지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 영국의 한 행사장에 등장한 아이스크림 트럭 옆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8월 영국의 한 행사장에 등장한 아이스크림 트럭 옆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미 런던에서는 현행법상 아이스크림 트럭이 특정 지역에서 하루 15분 이상 장사할 수 없게 돼 있다. 트럭이 15분간 머물렀던 장소에 또 가려면 다음날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과당경쟁 및 오염물질 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다.

 그런데도 지자체 의회들은 이보다 더 강도 높은 규제안을 예고 중이다. 가디언은 “런던 내 캠던타운 지역 의회는 이미 40개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트럭 영업 금지 조치를 내렸다”고 전했다. 해당 길에는 ‘아이스크림 판매 금지’ 표지판이 세워지고 이를 어긴 트럭 업주는 벌금을 문다. 이와 별도로 런던 내 탄소 저배출 구역(Low Emissions Zone)이 생기면서 일부 업주들은 트럭을 아예 교체하거나 매일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냉장고 보급 이후 ‘썰렁’…마약 거래까지

 현지에서 ‘아이스크림 밴(van)’으로 불리는 노점 트럭은 한때 지역 명물로 여겨졌다. 지금도 몇몇 유명 트럭들은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에서 자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운영한다. 트럭 운영자들이 70년 가까이 식음·관광업계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이른바 ‘아이스크림 협회(Ice Cream Alliance)’도 생겼다. 이 단체의 젤리카 카 회장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아이스크림 트럭이 우리의 거리에서 한꺼번에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토로했다.

 아이스크림 트럭 산업이 생존 위기로 내몰린 근본 원인은 수요 둔화다. 영국 BBC 방송은 “과거와 달리 집집마다 냉장고를 두고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면서 트럭 수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고 전했다. 아이스크림 트럭이 처음 인기를 끈 1950년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경제 부흥기다. 국내 영국사학회장을 역임한 김현수 단국대 교수(사학)는 저서에서 “1965년 영국 가구의 39%가 냉장고를 갖췄다”고 설명했다.

 노점 특성상 정확한 집계가 어렵지만, 가디언은 트럭 수가 전성기의 0.2% 선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 중이라고 보도했다. 수익성이 떨어지다 보니 업주들이 범죄 집단과 결탁해 각종 불법 거래에 개입한다는 의혹이 나온다. 마약상들이 유통 경로로 아이스크림 트럭을 활용한다는 게 대표적 예다. 지난해 1월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노팅엄 대학교 인근 아이스크림 트럭이 한겨울에도 성업하는 장면을 소개하며 “학생들이 (트럭에서) 코카인 등 마약을 사는 것이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만큼 쉬웠다”고 폭로했다.

문제는 ‘99플레이크’…환경문제 직격탄

 이런 상황에서 올해 들어 아이스크림 트럭 규제가 강화된 배경에는 영국 정가에 급속히 불어닥친 대기오염 개선 요구가 큰 몫을 했다. 1950~60년대 스모그 사태로 수천 명의 인명손실을 본 런던은 이른바 ‘원조 미세먼지 도시’로 꼽힌다. NYT는 “런던에서 장기간 대기오염 노출로 매년 9000명 이상이 사망한다”고 전했다. 최근 몇 년간 다시 치솟은 대기오염 수치에 민감해진 영국 의회는 지난 8일 기후변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런던에서 한 아이스크림 트럭 운영자가 독특한 모양의 자전거를 타고 있다. [로이터=연합]

런던에서 한 아이스크림 트럭 운영자가 독특한 모양의 자전거를 타고 있다. [로이터=연합]

 아이스크림 트럭 운영자들은 공회전이 불가피한 이유로 소프트아이스크림 기계를 지목한다. 계속 전원을 공급해야만 삼각뿔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콘 위에 짜낼 수 있다. 맨 위에 초콜릿 과자를 꽂아 주는 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현지에서는 ‘99 플레이크(99 flake)’라고 부른다. 트럭 규제를 반대하는 일부 시민들은 ‘내 99 플레이크에서 손을 떼라(HandsOffMy)’는 내용의 게시물을 SNS 등에 올리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일각에서는 아이스크림 트럭이 미세먼지 누명을 뒤집어쓰는 게 억울하다는 항변이 나온다. 런던에서 아이스크림 트럭을 운영하는 엔듀 멜리(45)는 최근 유럽연합(EU) 탄소배출 규제 기준에 맞는 트럭을 새로 구입했다며 NYT에 “택시, 관광객 버스, 대형 버스가 모두 연료를 태우고 돌아다니는데 의회가 잘못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불평했다.

 아이스크림 트럭을 위해 지상에 별도 발전기를 설치하거나, 전기 세발자전거를 이용하는 등의 대안도 나온다. 다만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환경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캐럴라인 러셀 영국 녹색당 하원 의원도 NYT에 “아무도 아이스크림과 함께 천식을 주문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향후 수년 사이에 거리에서 운영되는 아이스크림 밴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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