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33. 구월동시대 (중)

중앙일보

입력 2006.07.06 20:28

업데이트 2006.07.10 00:33

지면보기

종합 28면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의 전산화시스템을 견학하러 온 탈북 의사 출신 김만철(오른쪽에서 둘째)씨를 안내하고 있는 필자.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에 길병원을 건립하면서 나는 '병원 첨단화'에 온 힘을 쏟았다.

환자가 건물이나 시설에서만 편리함과 편안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 접수한 뒤 진료를 받고 처방약을 탈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이 번거롭지 않고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고심의 해답은 전산시스템 개발이었다.

나는 전산화를 위해 1984년 대형 냉장고만한 크기의 주컴퓨터인 ' MV10000'을 병원에 설치했다. 그리곤 의사.약사.간호사.영양사.물리치료사.방사선사와 경리.원무과 직원 가운데 골고루 한두 명씩 뽑아 모두 15명으로 전산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서 최초로 병원 전산화시스템을 갖추려다 보니 벤치마킹할 곳이 없었다. '전산'이란 단어조차 생소한 때였다. 기껏 원무과에서 입원비 계산만 전산처리하던 전자계산기 수준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눈을 해외로 돌려 직원들을 대만.일본.미국 등에 보내 전산교육을 시켰다.

3년여 연구 끝에 DOS(doctor's ordering system)를 자체 개발해 87년 구월동 길병원 개원과 동시에 적용했다. 그러자 환자와 보호자는 물론 의료계에서도 화젯거리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진료 접수증만 세 종류였다. 의료보험은 노란색, 산재보험의 경우 파란색, 일반은 하얀색 등 색깔이 다른 접수증을 환자가 직접 골라 작성해야 했다.

또 진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접수증을 다시 썼다. 그러나 우리가 개발한 시스템은 이 과정을 생략했다. 처음 온 환자가 접수증을 제출하면 환자기록이 담긴 '마그네틱 진료카드'가 발급된다. 환자가 이 카드를 판독기에 넣으면 진료과와 진료시간이 자동으로 정해졌다. 그리곤 환자가 진료실로 가는 동안 진료기록부는 에어슈터를 통해 바로 진료실에 전달됐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서기 전에 의료진은 진료 준비를 해 놓는 것이다.

또 X-선 촬영, 검사.투약 등의 처방이 내려지면 해당 검사실이나 약국에선 즉시 조치가 이뤄졌다. 주사 처방을 받고 진료실을 나온 은 환자가 몇 걸음 거리에 있는 주사실에 도착하자마자 투약이 이뤄지다 보니 전산시스템의 신속성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 하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따져 묻는 환자도 있었다. "그게 내 주사약인 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간호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여주며 "홍길동씨죠? 처방이 이렇게 나왔습니다. 감기 몸살이신가 보죠"라고 확인시켜 주면 환자가 깜짝 놀랐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투약 준비가 돼 있으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 첫 병원 전산화는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일가족을 이끌고 탈북한 의사 출신 김만철씨는 "언론에 보도된 길병원의 선진 전산시스템을 보고 싶다"며 우리 병원을 찾아와 시설을 둘러보곤 혀를 내둘렀다.

김씨는 이날 방문 기념으로 '평생 진료카드 1호'의 수혜자가 됐다. 그 뒤 우리 전산시스템을 보려고 대학병원 및 대형 종합병원 임직원은 물론 재미동포까지 병원을 찾아왔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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