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박보미의 아트 프리즘(1)
어렵게만 느껴지는 미술관 안팎의 작품. 어떻게 친해지면 좋을까?미술을 전공한 필자가 낯선 예술 이야기를 편안한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다. <편집자>
서양화가 박찬욱 초대전 리뷰
우리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엔 ‘믿는 만큼 보인다’고 확신한다. 두 가지 명제가 모순될 때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믿는 것이 보이는 것일까.
작가는 여기 있는 작품으로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던진다. 박찬욱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 것’과 ‘본다고 믿고 있는 것’의 경계를 날 서게 체험하게 된다.
나무판 작업의 첫인상은, 묘하게 서정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믹한 화풍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좀 이질적인 물체들이 보인다. 나사못, 나무의 갈라진 틈, 서명이 적힌 쪽지 같은 것들이. 이들은 작품 겉면에 대담하게 드러나 있는데, 잠깐 보면 진짜 못이라고 믿을 만큼 극사실적으로 묘사해놓았다. 습관적으로 ‘진짜’라고 생각하기 쉽다.
시각적인 착각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사물을 보는 방식을 조금쯤 각성할 수 있다. 느슨했던 감각도 일순간 팽팽해진다. 작가는 작품의 표면을 광택이 날 때까지 수없이 덮고 매만졌다. 매끄럽게 박제된 순간들은 향수를 자극하거나, 혹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다시 이미지가 암시하는 것을 음미하려는 순간 못 자국과 포스트잇이 눈에 거슬린다.
결국 모든 것이 평면이고 트릭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는 다시 각성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르는 사이 우리는 그가 붙잡아둔 세상 앞에서 ‘보는 것’과 ‘본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사유하게 된다.
소재도 같은 맥락이다. 전통적으로 캔버스는 작품과 일상의 벽을 직선으로 구분 짓는 기능과 권위를 가진다. 그는 캔버스 대신 부서진 선박에서 버려진 나무판을 선택했다. 둥그스름하게 다듬은 모양은 구름처럼 보이기도 하고 빗물이 고인 웅덩이 같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 속의 세상이 현실의 그것과 단호하게 구분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도의 가상현실 기술이 제공하는 판타지에 익숙한 우리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 작가의 방식이 원시적이고 불필요한 노동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예술의 힘이다. 화가가 손가락이 굽도록 붓을 쥐고 지독하게 묘사를 하거나 온종일 나무를 깎아대는 과정이 전달하는 체온의 묵직함은 프로그래밍과 고화질 픽셀의 효율성과는 목적이 다르다.
삶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한 이정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호한 시공의 경계선에 서서 낯설게 보기를 반복하다 보면, 당신도 평범한 풍경 틈에 숨죽인 단서를 발견할지 모른다.
박보미 아트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