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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사일에 속 끓는 비건…美 대화파 입지 좁혔다

중앙일보

입력

이도훈(왼쪽)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워킹그룹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뉴스1]

이도훈(왼쪽)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워킹그룹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뉴스1]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고민은 8~10일 방한 기간 동안 더 깊어졌다. 비건 대표가 한국에 와 있을 때 북한이 9일 단거리미사일을 두 발 쏘면서다. 대화파인 비건 대표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건 대표는 10일 기자들과의 직접 접촉을 모두 피했다. 당초 공개 예정이었던 ‘도어 스테핑(door steppingㆍ약식 기자회견)’과 강경화 외교장관 예방 시 모두발언 등 일정을 전부 비공개로 전환했다. 이는 기자단에 당일 오전에야 공지가 됐다. 미국 측 요청에 따른 것으로 파악됐다. 비건 대표와 미국 국무부가 9일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도발 직후 밤 사이 고민한 결과 직접 언론을 상대로 공개 메시지를 내지 않기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비건 대표는 한미워킹그룹 회의 후 외교부를 빠져나가면서도 “대북 식량 지원은 어떻게 되느냐”거나 “북한 측에 전할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미소로만 일관했다. 앞서 오전 9시 30분경 외교부로 입장할 때는 “굿모닝” 한 마디가 전부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지난 4일 동해상에서 진행된 대구경 장거리 방사포와 전술유도무기 화력타격훈련.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지난 4일 동해상에서 진행된 대구경 장거리 방사포와 전술유도무기 화력타격훈련.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비건 대표의 이번 방한은 시작 전부터 먹구름이 끼었다. 북한이 4일 단거리미사일로 관측되는 발사체를 쏜 데다 미ㆍ중 무역협상이 곧 합의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험로를 맞았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 내부엔 미ㆍ중 무역협상이 마무리되고, 북한도 중ㆍ러 측과 협의를 한 뒤 이르면 5~6월 즈음엔 대화의 신호를 보낼 것이라는 시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ㆍ중 무역협상이 어려움을 겪고 북한이 도발을 두 차례 강행하면서 상황이 혼탁해졌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직로 외교부에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양자 회담을 마친 뒤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없이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직로 외교부에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양자 회담을 마친 뒤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없이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비건은 국무부 내 대화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카운터파트인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 4월 연세대 강연에서 “대화에 대한 회의론이 독버섯처럼 확산하고 있지만 회의론은 대화의 대안이 못 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당시 비건 대표는 이도훈 본부장 측에 연락해 동의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미국 측 사정에 밝은 전직 외교관은 “비건 대표의 입지가 미국 정부 내에서 계속 축소되고 있을 수 있다”며 “비건 대표는 북한의 이번 미사일 도발로 운신의 폭이 크게 줄었다고 봐야 한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비건 대표의 입지가 축소되는 것은 북한 스스로 발등을 찍는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외교부에선 “비건 대표를 사면초가로 몰아가는 것은 북한에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비건 대표는 그럼에도 이날 오전 강경화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협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며 “한ㆍ미 간 소통과 협력을 지속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교부가 기자들에게 회동 후 전한 내용이다. 9일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체 도발 이후에도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강 장관은 비건 대표에게 ”북측의 최근 단거리 미사일 발사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 완화 노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로서 매우 우려된다“며 ”남ㆍ북ㆍ미 간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진지한 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비건 대표는 이날 카운터파트인 외교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도 예정에 없던 별도 회동을 했다. 당초 그는 이도훈 본부장과 함께 한ㆍ미 워킹그룹 회의를 주재할 예정이었으나 이날엔 인사말만 한 뒤 회의장을 빠져나와 둘 만의 회동을 가졌다. 비건 대표는 이날 오후 청와대 방문을 마친 뒤에도 이도훈 본부장과 함께 만찬을 하며 논의를 이어간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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