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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주세요" 하면 거품 채운 500 한 잔… 이거 정당합니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16)  

맥줏집에서 생맥주를 마실 때 종종 드는 의문이 있다. 400㏄, 500㏄ 등 메뉴판에 표시된 용량만큼 맥주양이 제대로 제공되는지에 대해서다. 일단 잔의 크기가 내가 시킨 용량만큼의 부피를 가졌는지 궁금하다. 때로는 거품이 지나치게 많이 따라져 맥주양이 적은 날도 있다. 그래 봤자 단 몇 ㏄ 차이겠지만 술꾼들에게 이것만큼 서운한 일도 없다.

잔에 따라진 맥주의 용량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맥주잔의 크기를 눈으로 가늠해 보는 게 고작이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의심이 현실인 것으로 드러난 조사 결과도 있었다. 지난 2012년 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내 맥줏집 90곳의 생맥주 제공량을 측정한 결과 주문량보다 실제 소비자에게 제공된 양이 평균 13~23% 모자랐다. 맥주 마시러 나갈 때마다 메스실린더를 지참하고 싶은 심경이다.

다양한 유럽 맥주잔. 맥줏집에서 생맥주를 마실 때 메뉴판에 표시된 용량만큼 맥주량이 제대로 제공되는지 종종 의문이 든다. [사진 pixabay]

다양한 유럽 맥주잔. 맥줏집에서 생맥주를 마실 때 메뉴판에 표시된 용량만큼 맥주량이 제대로 제공되는지 종종 의문이 든다. [사진 pixabay]

유럽 맥주 양조장들은 대부분 자사 맥주 맛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모양의 잔을 제작해 맥주와 함께 공급한다. 호가든의 각이 진 통통한 잔이나 필스너 우르켈의 손잡이가 달린 묵직한 잔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다양한 모양의 맥주잔은 수집욕을 불러일으킨다. 맥주별 전용 잔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독일, 아일랜드, 벨기에 등 유럽산 맥주들의 전용 잔에는 잔 윗부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용량 선이 표시돼 있었다. 아일랜드의 스미딕스 맥주잔에는 0.5ℓ 표시와 제조사(ARC)가 표기돼 있었다. 벨기에 수도원 맥주 베스트블레테렌 잔에는 용량선, 제조사, 제조연도에 CE 인증 마크까지 프린트돼 있다.

유럽산 잔은 예외 없이 용량 선이 그어 있어 맥주의 양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유럽에서 만든 맥주잔들은 표시 선까지 맥주를 따르고 그 윗부분은 맥주 거품이 차지할 수 있도록 적당한 공간이 있어 합리적이다.

벨기에 맥주 베스트 블레테렌 전용 잔. 용량 표시(0.33ℓ), 잔 제조사(ritzenhoff), 제조연도(2016년), 규제기관 코드(0122), CE 인증마크 등이 표시돼 있다. [사진 황지혜]

벨기에 맥주 베스트 블레테렌 전용 잔. 용량 표시(0.33ℓ), 잔 제조사(ritzenhoff), 제조연도(2016년), 규제기관 코드(0122), CE 인증마크 등이 표시돼 있다. [사진 황지혜]

유럽에서는 소비자 권익 향상을 위해 유리잔 제조사에 용량선(fill line) 표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유리잔을 만들 때 선으로 용량을 표시함으로써 소비자들이 음료의 양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럽연합 내 유리잔 제조사들은 측정 기기 지침(The Measuring Instruments Directive)에 따라 2004년부터 잔에 용량을 표시하고 용량에 해당하는 선을 그려야 한다. 이 지침 아래 국가마다 세부적인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용량 선과 함께 잔 제조업체명을 명시해야 하며 용량선 길이는 10mm 이상이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음료 용기 규정(Beverage Container Regulation)에 따라 10~50㎖ 용량의 용기는 용량 선의 부피 오차가 5% 이내여야 한다는 내용 등이 제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업장에서 주문한 양보다 맥주를 적게 주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자리 잡고 있다. “500 주세요.”라고 주문하지만 실제로는 부족한 양을 받게 되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기업 맥주를 판매하는 맥줏집들은 일반적으로 카스, 하이트 등 맥주 제조사에서 보급하는 유리잔을 사용한다. 우리가 500㎖ 용량 잔으로 알고 있는 대기업 맥주잔의 용량은 그에 미치지 않는다.

맥주 업계 관계자는 맥주잔 맨 윗부분까지 채워도 473ml이고 그것마저 거품을 채워서 팔기 때문에 실제 맥주의 양은 440ml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사진 unsplash]

맥주 업계 관계자는 맥주잔 맨 윗부분까지 채워도 473ml이고 그것마저 거품을 채워서 팔기 때문에 실제 맥주의 양은 440ml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사진 unsplash]

맥주 업계 한 관계자는 “카스나 하이트 잔의 실제 용량은 잔 맨 윗부분까지 채워도 473㎖”라며 “그것마저 거품을 채워서 팔기 때문에 실제 맥주의 양은 440㎖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피처’라고 부르는 대용량 플라스틱 용기의 용량도 마찬가지다. 2000㎖를 기대하며 시키지만 대부분 그보다 적은 양을 받게 된다.

2013년 이후 정부가 맥주 제조사들이 공급하는 잔에 한해 용량 선을 표시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대부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만약 맥주 제조사들이 모든 잔에 용량 선을 표시해 배포한다고 해도 맥줏집에서 자체적으로 잔을 조달해서 사용한다면 소비자가 양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대기업 잔을 사용하지 않는 수제 맥주 전문점도 예외라는 증거는 없다.

어디서든지 소비자들이 믿고 맥주를 소비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에서도 조속히 맥주잔 용량선 규제가 시작돼야 한다. 잔에 정확한 용량을 표기하고 맥줏집에서 용량 선에 맞춰 맥주를 따라 준다면 ‘믿고 마시는’ 사회가 구현되는 동시에 우리의 맥주 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황지혜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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