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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믿지 말라던' 류현진, 야수 활용한 영리한 피칭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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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시절 류현진(32·LA 다저스)의 별명은 '소년 가장'이었다. 당시 한화는 수비도, 타선도 약했다. 마운드에 선 류현진은 좀처럼 동료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유명한 일화도 있다. 당시 류현진은 한 TV 프로그램에서 어린이 야구선수를 만났다. 그 어린이가 "수비를 믿고 공을 던진다"고 말하자 류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류현진은 "수비를 믿으면 안 된다. 네가 타자를 잡아내야 한다. 무조건 삼진으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저스, 애틀랜타에 9-0 으로 완승 #다양한 구종, 정확한 제구력으로 압도 #터너, 홈런 3개 터뜨리며 타선 지원 #LA타임스 "무자비하게 효율적 피칭" #

마운드 위에서 투수의 마음가짐을 강조한 말이었지만 그만큼 동료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류현진은 가능하면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체력을 분배하면서 완급 조절 능력을 몸에 익혔다. 주자가 없거나, 경기 초반엔 힘을 아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 힘있는 공을 뿌렸다.

8일 애틀랜타전에서 역투하고 있는 류현진. [AP=연합뉴스]

8일 애틀랜타전에서 역투하고 있는 류현진. [AP=연합뉴스]

2013년 미국에 간 뒤에도 류현진은 바뀌지 않았다. 시속 150㎞ 강속구로 상대를 윽박지른 뒤 직구와 똑같은 폼에서 나오는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했다.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둔 2013년 5월 29일 LA 에인절스전에서도 그랬다. 1회부터 최고 95마일(약 153㎞)의 포심패스트볼로 상대를 제압한 뒤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를 섞어 안타 2개만 내주고 9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류현진은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6년 만에 두 번째 완봉승을 거뒀다. 9이닝 동안 4안타만 내주고 무실점으로 막았다. 겨우 93개의 공을 던지면서 탈삼진 6개를 뽑아냈다. 볼넷은 한 개도 내주지 않았다. 다저스가 9-0으로 이기면서 류현진은 시즌 4승(1패)째를 거뒀다. 다저스 투수가 완봉승을 거둔 건 2016년 5월 클레이턴 커쇼(신시내티전) 이후 3년 만이다. 류현진은 애틀랜타전 4번째 등판 만에 승리를 따내면서 내셔널리그 전 구단(14팀) 상대 승리 기록도 세웠다.

두 번째 완봉승은 첫 번째와는 정반대의 방식을 사용했다. 이날 류현진의 직구 평균 구속은 145㎞에 머물렀다. 이전까지 류현진을 상대로 6타수 4안타를 기록 중이던 강타자 프레디 프리먼을 상대할 때는 최고 150㎞의 공을 뿌렸지만, 나머지 타자들을 상대할 땐 140㎞대 초중반의 공을 던졌다.

경기 초반부터 동료들의 지원도 활발했다. 다저스는 3년 연속 내셔널리그 챔피언에 오른 강팀이다. 힘있고, 빠른 야수들이 많다. '소년 가장'에서 '부잣집 둘째 아들'로 변신한 류현진은 힘으로 맞서는 피칭을 고집하지 않았다. 2015년 어깨, 2016년 팔꿈치 수술로 과거와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류현진은 정교한 제구력으로 스트라이크와 볼 경계선 부근에 공을 던졌다. 컷패스트볼, 투심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 등을 현란하게 뿌리면 수비수들이 척척 잡아내면서 아웃카운트를 늘렸다. 5회까지 15타자를 상대로 퍼펙트 행진을 하는 동안 투구수는 54개에 불과했다.

6회 선두타자 타일러 플라워스에게 첫 안타를 허용했다. 플라워스는 류현진의 커브를 받아쳐 3루수 저스틴 터너 옆으로 빠져나가는 안타를 뽑아냈다. 터너는 무릎을 꿇고 퍼펙트가 깨진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류현진은 표정 변화 없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그러자 야수들의 호수비가 연달아 나왔다. 2루수 맥스 먼시는 6회 1사 1루에서 찰리 컬버슨의 느린 타구를 잘 처리해 병살타로 연결했다. 7회 2사 2루에선 우익수 코디 벨린저가 파울라인까지 전력질주한 뒤 환상적인 다이빙 캐치를 해냈다.

투구수가 줄면, 야수들의 집중력이 높아지고, 타격에도 도움이 된다. 다저스 타자들은 타석에서도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터너가 홈런 3개 포함 5타수 4안타·6타점의 맹활약을 펼쳤다. 다저스는 장단 11안타를 몰아치며 9점을 뽑아냈다. 타자 류현진도 5회 세 번째 타석에서 시즌 첫 안타를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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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타임스는 "류현진이 무자비하게 효율적인 피칭(ruthlessly efficient)을 했다"고 극찬했다. 이날 3개의 홈런을 터뜨린 터너는 “류현진은 과소평가된 투수다.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지기 위해 크게 애쓸 필요가 없다”고 평가했다. 지역 매체 다저 블루는 "류현진이 매덕스했다"는 표현을 썼다. 제구력이 뛰어난 전설적인 투수 그렉 매덕스가 100개 이하의 공으로 자주 완봉승을 거뒀던 일을 거론하며 이날 류현진의 제구력을 칭찬했다.

방탄소년단 슈가와 류현진. [사진 다저스 트위터]

방탄소년단 슈가와 류현진. [사진 다저스 트위터]

류현진은 "퍼펙트 경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며 "완봉승은 선발투수에게 가장 좋은 결과다. 상대 타자들과 빠르게 승부한 덕분에 완봉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부모님과 아내, 친구들이 오늘 야구장에 왔다. 엄마 생신인데 좋은 선물을 드릴 수 있었다"며 기뻐했다. 류현진은 이날 경기가 끝난 뒤 월드 투어 도중 이날 경기장을 찾은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와도 악수를 나눴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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