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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잘되라고… 늙은 부모에겐 죽만 주는 자식, 효자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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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87)

가까운 지인의 부친이 오랜 숙환으로 어느 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식들을 불러 집에서 죽게 해달라며 자식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사진 unsplash]

가까운 지인의 부친이 오랜 숙환으로 어느 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식들을 불러 집에서 죽게 해달라며 자식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사진 unsplash]

가까운 지인이 부친의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라며 잠시 들렀다. 오랜 숙환으로 병원을 전전하시던 구순이 넘으신 아버님이 어느 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식들을 불러 ‘집에서 죽게 해다오’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하셨단다.

당신의 성격과 흐트러짐 없이 살아오신 모습을 봐도 추하지 않은 죽음으로의 길을 희망하셨을 것이다. 혼란에 빠진 자식들이 부랴부랴 회의했는데 만장일치로 가기 싫다는 요양병원으로 모셔서 수액과 영양제를 공급하며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어르신이 다시 살아났다.

그 날 이후 당신의 몸은 살았으나 정신은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지 몇 달이 지났다고 한다. 오늘 지인이 와서 조심스레 말하길 ‘그때 가족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동의하고 집에서 임종을 지켜봤으면 어땠을까? 뼈에 가죽만 남은 저 몰골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한다는 것이 어쩌다가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그땐 온 힘을 모아 살렸는데 반응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곱 형제 중 누구 하나 아버지 편에 서고 싶어도 들 수 없는 게 돌아가시고 난 후에 떠맡게 될 살인자 아닌 살인자로 형제들에게 눈총을 받을 것 같아서였으리라는…. 어수선한 마음을 이야기하며 이제 산사람이 서서히 지쳐가는 중이라고 한다.

오래전 독거 어른 돌봄 일을 할 때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지만, 정신은 맑으신 어르신이 계셨다. 어느 날 하루 점심시간 즈음에 방문하니 십여명쯤 되는 자식들이 어르신의 병문안을 와서 마당에서 점심을 들고 계셨다.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는 어르신 댁이다. 그 어르신은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휠체어를 타고 그윽하게 바라보셨다.

그날 점심은 마당에서 돌판에 구운 삼겹살이 메뉴였다. 아들에게 ‘부모님은 왜 안 드리냐’ 하니 어머니는 이가 없으셔서 못 드시고 아버님은 노환에 소화가 잘 안 되어 속이 편안하도록 따로 죽을 준비해 놨다고 했다. 할머니도 아무 말씀 없이 옆에 앉아 계셨다.

그때 그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내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난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내 건강을 걱정한다며 고기 한 점 안 주네요. 지금 내 상황에 건강이 뭐가 중요한지….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이리 사는 게 살아 있어도 죽은 거지요. 아파서 누우면 내 몸도 그냥 짐 덩어리라오.”

 ’난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내 건강을 걱정한다며 고기 한 점 안 주네요.지금 상황에 건강이 뭐가 중요한가"예전 모시던 한 어르신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진 pixabay]

’난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내 건강을 걱정한다며 고기 한 점 안 주네요.지금 상황에 건강이 뭐가 중요한가"예전 모시던 한 어르신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진 pixabay]

나는 잘 구워진 삼겹살을 내가 먹을 것처럼 몇 개 들고 와서 잘게 자르고 두드려서 어르신 입에 넣어드리니 우물우물하시며 몇 점을 드셨다. 며칠 후 그 어르신은 돌아가셨다. 그날 내가 삼겹살을 몰래 드려서 일찍 돌아가셨나 하며 한동안 반성했던 기억이 난다.

라디오를 켜니 건강 프로에 나오는 어느 미망인의 전화 대화가 마음에 닿는다.
“병원에 누워 계시는 분들이 계시면 드시고 싶다는 거 다 드리세요. 내 남편은 본인이 굶어 죽은 게 아니라 제가 굶겨 죽였습니다. 의사가 고기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식이섬유만 먹으라고, 식이요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그렇게 고기가 먹고 싶다는 걸 못 먹게 하고 살을 빼니 말라서 죽었어요. 이게 무슨 치료인가요?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건데 오래 살고 안 살고는 본인이 알아서 사는 건데 내가 내 욕심에 남편을 죽인 거예요. 인생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에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남의 인생을 내 맘대로 길고 짧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문득, 얼마 전에 며느리의 품에서 돌아가신 한 어르신이 생각난다. 간호사로 일하는 내 친구는 시어머니의 부탁에 마지막 몇 개월을 집에서 병간호하며 임종을 지켰다. 돌아가실 때 아들은 두려워 지켜보았지만, 친구는 어머니를 품에 안고 토닥토닥하며 먼 길을 보내 드렸다.

아이가 없어 늘 노심초사 남편의 눈치를 보며 산 내 친구는 지금 여왕 같은 대우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렵고 무서운 먼 길 떠나는 시어머니의 배웅 길에 동무가 되어준 그 친구가 자랑스럽고 멋지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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