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지자체의 축성은 낙성의 지름길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지방의 1995년은 국가의 1987년이다. 나라는 밑으로부터의 87년 체제로 대통령 직선제가, 지방은 위에서의 95년 체제로 자치단체장 민선이 시작됐다. 국가와 지방의 민주주의 틀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두 체제는 한국 정치의 분기점이지만 제도 피로가 역력하다. 87년 체제의 고질은 5년의 사고 회로다. 단임 대통령제는 저출산 등 시대의 장기적 숙제에 효율적이지 못하다. 정권마다 단기간에 빛이 나는 사안에서 정치적 유산을 찾기 일쑤다.

95년 체제의 고질은 행정구역 중심 사고다. 민선이 거듭하면서 영역주의가 강해졌다. 강 건너 쪽은 표와 상관이 없다. 이웃 지자체는 경쟁 상대일 뿐이다. 만년 적자의 너도나도 지역 축제는 그 산물이다. 일부 지역은 분열의 중앙 정치가 짓누른다. 단체장 소속 정당은 또 다른 벽이다. 중앙 정부는 자치·분권의 대의 앞에 개입을 꺼린다. 지자체는 저마다 철옹성이 됐다. 민선 직전 39곳의 도농(都農) 통합시가 탄생했지만, 그 이래 개편은 3건(통합 여수시·창원시·청주시)에 불과하다. 지방 행정 개혁도 개헌 못잖은 난제다.

행정구역이 철의 장막이 되지 않아야 이유는 간단하다. 실생활이 행정구역을 넘어 이뤄진다. 전국은 거미줄처럼 엮였다. 도로망, 철도망이 우후죽순이다. 시간적 거리가 우리처럼 단기간에 줄어든 나라는 드물다. 지자체를 넘는 행정 수요가 넘쳐난다. 100년 전 행정구역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반면 전국 시·군 상당수는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다. 면적은 서울만 한 데 인구가 한 대학의 재학생보다 적은 곳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지자체는 자력갱생, 각개약진이다. 고비용 체제다.

행정구역의 광역화·유연화는 세계적 추세다. 규모의 경제 때문이다. 일본은 1999~2006년 기초단체인 시·정·촌을 3232곳에서 1820곳(현재 1718곳)으로 줄였다. 중앙 정부 주도의 ‘헤이세이(平成) 대합병’이다. 교부세 삭감 계획에 지자체가 굴복했다. 울며 겨자먹기식 통합이다. 그래도 기초단체는 재정난이다. 대도시권을 뺀 304개 기초단체가 이번엔 32개 ‘권역연대중추도시권’을 결성했다. 권역 내 공공시설 압축과 공동 이용을 위해서다. 간사이(關西)광역연합은 경제계가 쏘시개 역을 한 거대 지역연대 공공단체다. 간사이 8개 광역단체와 4개 시가 방재·관광·산업 등 7개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 연합은 지방이 쟁취한 분권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도 현상 타파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대구·경북을 보자. 두 광역단체가 자발적 상생위원회를 가동 중이다. 조례로 제도화한 조직이다. 위원장은 두 단체장이고, 별도의 사무국을 두고 있다. 요체는 42개 협력 사업이다. 광역철도망, 대구공항 통합이전, 공무원 통합 교육 등 굵직한 분야가 많다. 관광 분야 협력은 주목거리다. 해외 관광객 유치엔 두 단체의 연계가 불가결하다. 불교(경주)·유교(안동) 문화권 등 관광 자원과 대구의 숙박·쇼핑 인프라가 합쳐야 지역에 돈이 더 떨어진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산업 연계의 축은 대·구·포다. 대구·구미·포항 벨트를 발전의 견인차로 삼는 전략이다. 두 단체장은 올해 문화체육관광국장과 경제과장의 1년간 맞파견 인사도 단행했다. 상생·협력에 대한 결기다. 형식(제도)은 결국 내용을 지배한다.

광역권에선 충청권 등 행정협의회가 있지만, 협력 수준은 낮다. 기초단체에선 지리산권 7개 시·군의 관광개발조합이 눈에 띄는 정도다. 지자체 통합이 어렵다면 차선책은 장벽을 낮추는 일이다. 두레나 품앗이의 협업 정신은 우리의 DNA가 아니던가. 지자체의 축성(築城)은 낙성(落城)의 지름길이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