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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단녀 박사, 세계1% 논문 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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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유민(維民) 홍진기(1917~86) 한국 최초 민간 방송인 동양방송(TBC)을 설립하고 중앙일보를 창간해 한국 대표 언론으로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홍진기 창조인상은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 발전기에 정부ㆍ기업ㆍ언론 분야에서 창조적인 삶을 실천하는 데 힘을 쏟았던 고(故) 유민(維民)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2010년 제정됐다.

토종박사, SCI급 논문만 74건 #2년 전까지 무급 연구강사 신분 #차별 받는 여성들 위한 멘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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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영예를 안은 올해 수상자들은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창의성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힘과 긍지를 세계에 떨치고 새 비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는 이홍구 전 총리, 송자 전 교육부 장관, 송호근 서울대 석좌교수,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이건용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맡았다. 이홍구 심사위원장은 “기성세대의 과거 업적을 포상하는 기존 상들과 차별화해 인류 문명의 변혁기에 젊은 세대의 미래 가능성을 격려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박은정 경희대 동서의힉대학원 교수는 요즘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은정 경희대 동서의힉대학원 교수는 요즘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제10회 유민 홍진기 창조인상 사회부문 수상자

박은정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교수 

박은정(52) 경희대 동서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나노물질의 독성 분야에서 뛰어난 과학자다. 글로벌 정보분석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옛 톰슨 로이터)가 선정한‘연구성과 세계 상위 1% 연구자(HCR)’에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올랐다. 박 교수의 총 논문 수는 국제 과학논문 색인(SCI)급만 74건, 국내 저널을 합치면 94건에 이른다. 2011년에는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대통령 포스닥 펠로우십’에 처음으로 선정됐다. 연구 역량이 최고조에 달한 비정규적 과학자들에게 초기 일자리와 연구비를 지원해주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사업이다. 2015년에는 지식창조대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에 이어 두번째 여성과학자였으며,비정규직 연구자로서는 최초였다.

이쯤되면 나도독성 분야의 대표적 석학 고참 교수처럼 보이지만, 2017년말까지만 하더라도 경기도 한 4년제 대학의 ‘무급 연구강사’ 신분이었다. 말이 강사이지, 해당 대학 교수의 실험실 귀퉁이를 빌려 쓰는 셋방살이 신세였다. 그것도 실험 재료비를 직접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연구비는 한국연구재단에서 나오는 연간 5000만원이 전부였다. 세계 상위 1% 연구자나, 대통령 포스닥 펠로우십이라는 성과와 경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학에서도 그를 정식 교수로 부르지 않았다.

박은정 경희대 교수가 지난해 12월 EBS의 '질문있는 특강 쇼 빅뱅'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처]

박은정 경희대 교수가 지난해 12월 EBS의 '질문있는 특강 쇼 빅뱅'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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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있었다. 박 교수는 명문대 출신도, 해외유학파도 아니었다. 게다가 ‘경력단절’ 여성 과학자였다.  모교 동덕여대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박사학위를 받은 건 마흔이 돼서야였다. 그 사이 취직과 결혼ㆍ육아, 양가 부모님 병간호 등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박사학위를 마칠 때 SCI급 해외저널에 5편의 논문을 싣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이곳저곳 비정규직 연구자 신세를 거쳐야 했다.

‘기적 아닌 기적’은 2017년 11월 일어났다. 중앙일보가 ‘5겹 유리천장에 갇혔지만, 세계 1% 논문 쓴 경단녀 박사’라는 기사를 보도하면서였다. KAIST를 비롯한 국내 주요 대학들 사이에 교수 영입 경쟁이 벌어졌다. 결국 박 교수가 선택한 곳은 경희대 동서의학전문대학원이었다. 경희대는 박 교수를 테뉴어 정교수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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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요즘 연구자 외에 다른 일이 생겨 더 바빠졌다. 자신처럼 경력 단절과 여성 차별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멘토 활동이 대표적이다. 고려대 이공계 여학생 네트워크 등 대학생들을 위한 특강과 행정안전부 주관 실패박람회의 홍보대사, EBS‘질문있는 특강쇼- 빅뱅’출연, 차세대 융합기술원 융함문화콘서트 참여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박 교수는 “절망의 끝에서 포기할 즈음에 기적처럼 교수가 돼 나만의 랩을 가지고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할 수 있게 됐다”며 “결혼ㆍ육아 등으로 경력단절이 된 연구자들에겐 포기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실력있는 연구자들을 배경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박은정(1967년생.)
▶1967년생. 영파여고-동덕여대 건강관리학과-동 약학대학원 석ㆍ박사 ▶대통령 포스닥 펠로우십(2011~2016년), 세계 1% 우수연구자(HCRㆍ2016~2018)▶아주대 연구강사 ▶현재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융합건강과학과 정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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