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늘 빨간 볼터치 해줄게”티셔츠 할배의 특별한 어린이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윤호섭 교수가 어린이들에게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김정연 기자

윤호섭 교수가 어린이들에게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김정연 기자

어린이날(5일) 뚝섬한강공원 한켠 천막에는 티셔츠에 그림을 그리는 한 할아버지를 어린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초록색 붓 끝에선 돌고래·별·나뭇잎 등이 나와 흰 티셔츠에 앉았다.

“예전에 볼터치를 빨갛게 하다가 친환경 물감이 아니어서 한동안 안썼는데, 오늘 어린이날이라서 특별히 빨간 볼터치를 해줄게.”

“친환경 물감이 뭐에요?”

“냄새 맡아봐. 석유냄새 안 나지? 100퍼센트 천연물감이야. 물로 희석하구. 광물·야자유·송진 같은 게 들어가서 풀냄새 나지?”

할아버지는 국민대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윤호섭(76) 명예교수다. 2008년 정년퇴직했다. 윤 교수는 ‘티셔츠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2002년부터 일요일마다 초록 물감으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해왔는데,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뚝섬에서는 1년에 한 번 그림을 그린다.

티셔츠 할배, 알고보니 '효리 웨딩드레스' 키웠네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윤호섭 교수의 작업실 앞. 김정연 기자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윤호섭 교수의 작업실 앞. 김정연 기자

윤 교수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나와 상업광고를 만들었다. 그러다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포스터를 제작하고 대회에 참석했다. 그 때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국민대에 ‘환경과 디자인’ 과목을 개설했고, 나중에는 ‘그린디자인대학원’을 만들어 그린디자이너를 양성했다.

청출어람이라고 할까, 윤 교수의 제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친환경 문구류 디자인을 하는 ‘공장’, 친환경 컵을 만드는 ‘에코준’, 반핵과 돌고래 보호 등의 메시지 가방을 만드는 ‘23.536.5’가 대표적인 회사다. 또 위기에 처한 남극 펭귄을 형상화해 장난감으로 만든 ‘리펭구르’, 이효리 등 유명인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한 ‘대지를 위한 바느질’도 윤 교수 제자의 회사다. 에코준은 2012년 독일 레드닷 디자인어워드에서 상을 받았다. 제자들은 종종 작업실을 찾고, 자투리 종이를 버리지 않고 윤 교수의 디자인을 인쇄해 보낸다.

종이방석 앉아서 손으로 '슥슥' 하면 작품…냉장고·에어컨·가구 없는 작업실

6일 찾은 강북구 우이동 윤 교수의 작업실은 한쪽 지붕이 훤히 뚫려 있어 야외에 있는 느낌이었다. 천장에는 2009년 인천공항에 전시했던 작품의 일부인 파라핀 굴비가 걸려 있었다. 윤 교수는 “초록색 페인트를 칠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초록색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2003년 냉장고와 에어컨을 없앴다. 지난해 여름은 물수건 다섯 개로 났다.

골판지 방석과 테잎 공. 김정연 기자

골판지 방석과 테잎 공. 김정연 기자

그의 작업실에서 '골판지 방석'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가구를 사지 않고 골판지를 여러 겹 겹쳐 단단하게 고정한 종이 방석을 만들어쓴다. 높이 겹쳐 쌓으면 의자가 되고, 넓게 펼쳐 쌓으면 평상이 된다.

윤호섭 교수가 그린 스케치들. 왼쪽부터 '동물단체 케어 안락사 논란' 'KTX 탈선' 'KT 아현지사 화재' '빙상계 성폭력'과 관련한 이미지. 김정연 기자

윤호섭 교수가 그린 스케치들. 왼쪽부터 '동물단체 케어 안락사 논란' 'KTX 탈선' 'KT 아현지사 화재' '빙상계 성폭력'과 관련한 이미지. 김정연 기자

2013년 서울시 원전하나줄이기의 캐릭터였던 '햇빛천사 동글이'. 김정연 기자

2013년 서울시 원전하나줄이기의 캐릭터였던 '햇빛천사 동글이'. 김정연 기자

'다음세대'와 '공존'하기 위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는 과정"

윤 교수는 최근 몇 년 간 ‘공존’과 '다음 세대'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달엔 베트남 호치민 시의 반랑대학교에서 열리는 디자인 컨퍼런스에 ‘Coexistence(공존)’을 주제로 워크샵을 열기도 했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15년이 넘게 길거리에서 티셔츠를 그려주고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윤 교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고,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은 10명에 한 명 정도”라며 “하루에 두세명 꼴인데,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수확이다. 나태해졌다가도 다시 기운이 솟는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실 달력에는 학생들과 어린이들의 방문 일정이 다달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오면 작업실의 이것저것을 보여주고 질문을 유도한다. 6월엔 제주도에 가서 어린이들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어린이들은 내 다음다음 세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는 과정이다”고 했다.

베트남 워크숍 포스터에 그려진 제돌이 그림. 김정연 기자

베트남 워크숍 포스터에 그려진 제돌이 그림. 김정연 기자

그의 ‘공존’에는 동물도 포함된다. 그가 그리는 티셔츠의 돌고래는 서울대공원에 있다가 제주도 바다로 돌아간 ‘제돌이’를 모티브로 했다. 그는 서울대공원에서 제돌이를 만난 일화를 들려줬다. "돌고래가 지능이 있다기에, 갖고 있던 티셔츠에 돌고래를 그려서 보여줬어. 근데 돌고래가 티셔츠 돌고래에 입맞춤을 하더라고. 알아보고 입을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묘했어.”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