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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검찰은 '토사구팽' 신세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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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청와대와 여당이 밀어부치고 있는 사법개혁안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문무일 검찰총장. 해외 출장 일정을 단축하고 4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문 촌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청와대와 여당이 밀어부치고 있는 사법개혁안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문무일 검찰총장. 해외 출장 일정을 단축하고 4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문 촌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새를 잡고 나면 활을 창고에 넣고(鳥盡藏弓),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兎死狗烹).” 춘추시대 월나라 재상 범려가 던진 경고다. 천하를 얻은 한나라 유방에 의해 목이 달아난 한신의 고사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문 정부 적폐청산에 앞장선 검찰 #사법개혁안에 문무일 강력 반발 #영화 '1987'이 그린 경찰공화국 #다시 경찰공화국 되면 국민 피해 #시간 갖고 합리적 대안 모색해야

토사구팽 고사가 문득 생각난 것은 검·경 수사권 조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의 패스트 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직후 나온 문무일 검찰총장의 반응을 보고서다. 문 총장은 지난 1일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법률안들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반한다”는 입장을 이례적으로 발표했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에 ‘항명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2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한 뒤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2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한 뒤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사실 ‘노무현 정부 2.0’으로 불리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만 하더라도 검찰이 개혁 대상 1순위가 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뇌물 수수혐의로 조사받다 비극적인 선택을 한 데 대해 문 정부 주도 세력들이 어떤 식으로든 검찰에 한풀이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정부는 예상을 깨고 지난 2년간 검찰 권력을 역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문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을 잇달아 구속하고 사법 농단을 단죄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 드라이브에 앞장섰다.

그런데 최근 반전이 일어났다. 적폐 청산이 상당히 진척되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좌파 진영에 의해 사실상 접수되자 이제는 검찰이 도마 위에 올랐다. 심지어 토사구팽이란 말이 나온다.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된 검찰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 뒤로 이 정부 들어 구속된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보인다.[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 뒤로 이 정부 들어 구속된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보인다.[청와대 사진기자단]

하지만 현재 패스트 트랙에 오른 공수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안은 국민 권익 보호 관점에서 볼 때 최선의 대안으로 보기엔 미흡하다. 특히 검찰의 권한을 줄인다면서 경찰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도록 하는 수사권 조정안에 공감하기 어렵다. 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가 낮은 것이 사실이지만, 드루킹과 버닝썬 사건 수사에서 보듯 경찰의 역량과 도덕성도 믿기 어렵다. ‘검찰 공화국’을 피하려다 ‘경찰 공화국’을 초래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검찰의 수사 지휘권을 폐지하는 대목이다. 현행 형사소송법 196조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관해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고 돼 있고 ‘경찰은 수사 관계 서류와 증거물을 지체 없이 검사에게 송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경찰에 대한 검사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찰을 견제하고 인권을 보호할 중요한 장치로 보는 시각도 많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을 관람하고 있다. 오른쪽은 경찰공화국 시절의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박처원 치안감 역을 맡았던 배우 김윤석.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을 관람하고 있다. 오른쪽은 경찰공화국 시절의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박처원 치안감 역을 맡았던 배우 김윤석.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관람한 영화 ‘1987’을 보면 경찰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을 물고문하고도 진실을 은폐했다. 영화처럼 경찰은 검찰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인권을 짓밟았다. 영화 속에서 경찰이 검사에게 위세를 부리는 장면이 어떤 검·경 역학 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간파하지 못했다면 영화를 허투루 본 것이다. 견제 장치가 미흡한 상태에서 수사권을 쥐었을 때의 경찰을 한번 생각해보라.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당시 울산경찰청의 전격적인 시장 측근 수사가 불리하게 작용해 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김기현 전 울산시장은 정치와 엮인 경찰권 남용을 뼈저리게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보 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국내 정보를 장악한 경찰이 수사권까지 틀어쥐게 되면 경찰 공화국이자 사찰 공화국이 될 수밖에 없다. 인사에 목을 매는 경찰은 검찰보다 다루기 쉬워서 권력자가 정치적으로 경찰 권력을 맘껏 이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가 한창일 때 당시 김기현(왼쪽) 울산시장 측근을 구속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을 일으킨 당시 황운하 울산경찰청장(현 대전경찰청장). 황 청장은 편파 수사 등으로 고발당했고 검찰이 수사중이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가 한창일 때 당시 김기현(왼쪽) 울산시장 측근을 구속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을 일으킨 당시 황운하 울산경찰청장(현 대전경찰청장). 황 청장은 편파 수사 등으로 고발당했고 검찰이 수사중이다.

민주화 이전의 경찰공화국 시대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경찰·검찰·법원의 상호 견제가 작동하는 현 체제가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1997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을 구속한 심재륜 대검 중수부장의 기개를 기억한다. 반면 경찰이 정치권력에 맞서 용기 있게 권력의 몸통을 찌른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나마 검찰은 정권 중반기를 넘으면 살아 있는 권력의 치부도 파헤친다. 검찰을 견제할 공수처 신설 법안을 여당이 밀어붙이는 것도 집권 후반기 검찰의 칼이 어디로 향할지 그만큼 두렵기 때문 아닐까.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제한하는 수사권을 손댈 때는 신중히 해야 한다. 패스트 트랙에 올랐다고 버스가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국민과 전문가 의견을 두루 듣고 공수처와 경찰권의 오남용 대책부터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

과거 경찰공화국의 폐해를 망각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다.

경찰공화국 시절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희생됐다.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는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됐다. 오른쪽은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 [중앙포토]

경찰공화국 시절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희생됐다.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는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됐다. 오른쪽은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 [중앙포토]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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