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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 그리움 사이에 피어나는 꽃, 너의 이름 진달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순의 시골 반 도시 반(5)

해마다 봄이면 입맛을 싹 잃어버린다. 대신 청각과 시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봄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산이며 들판을 훑는다. 침묵하던 나뭇가지들이 열에 들뜬 듯 붉은빛을 띨 즈음 봄의 선동자 산수유가 노란빛을 띠며 봄의 환영을 내비친다. 무채색 나무 색깔 위로 수채화 노랑 물감이 붓질을 더해갈 무렵, 회갈색 나무숲에 분홍 점이 하나둘 찍히기 시작한다.

진달래. 지나온 과거 같고 먼 미래 같은 꽃이다. 과거처럼 사연은 스몄으나 고요하고, 먼 미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세상에 가는 날 피어 있을 것 같은 꽃이다. 이즈음 나는 잘 먹지 못해 허리가 쏙 들어간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이면 남편은 나를 태우고 동네 야산 조그만 골목골목을 돌아준다. 나는 눈으로 봄의 허기를 채우고 봄의 환영에 나의 그림자도 스민다.

도회형 남편과 시골형 아내

진달래 피는 봄이 되면 나는 입맛을 잃는다. 남편은 이런 내가 눈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도록 동네 골목골목을 함께 돌아준다. [사진 한순]

진달래 피는 봄이 되면 나는 입맛을 잃는다. 남편은 이런 내가 눈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도록 동네 골목골목을 함께 돌아준다. [사진 한순]

약간 도회형인 남편, 약간 시골형인 나는 도시에 나흘 살고, 시골에 사흘 사는 일상이 늘 토닥토닥 투닥투닥이다. 시골집에서 서울로 올라가려고 청소를 할 때면 남편의 행동은 빨라지고,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두 시간 후쯤이면 좋아하는 소파와 커다란 텔레비전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반면 나는 시골에 집을 놔두고 왜 또 도시로 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과 일하기 싫다는 꾀가 합쳐 청소하다가도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커피잔을 들고 뜰로 나가 원추리 싹이 꽃대를 밀어 올리나 살피기도 한다. 그러면 그는 애가 타서 “순아, 착하지. 차 막힌다” 하기도 하고 “그래, 차 마시고 있어. 거기 내가 청소할게” 하며 내 청소까지 돕기도 한다.

그와 나는 동업자다. 동업자가 결혼한 것인지, 결혼해 동업자가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 둘이 토닥거리다가 경험이 풍부하고 연륜이 높은 분께 우리 부부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동업자라고 생각하시오.”라며 매우 명쾌하고 현실적인 답변을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부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출판사에서 나는 기획과 편집을, 그는 영업과 운영 관리와 기획에 같이 참여하니 우리는 거의 24시간 붙어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나의 직장 상사이므로 내가 복종하고 명령에 따라야 함에도, 나는 아내의 자리에 서서 “안 해. 내가 왜 그걸 해야 되는데….”, “싫어, 피곤해. 안 갈 거야” 하고 어이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나 혼자 늦은 밤까지 시사 프로그램을 보다가 책의 기획 거리가 생각나 아무 생각 없이 자는 그를 흔들어 깨워 그가 “그냥 자, 이년아^^”라는 위트 있는 유머를 날리게도 한다. 이런 그와 내가 많은 갈등을 해소하는 곳은 바로 차 안이다. 그는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에 앉아 가운데 커피 보온병을 두고 시골집에서 서울로 오는 길, 또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길에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남편과 도시로 향하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말수가 적어지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된다. 1984년, 남편이 내게 청혼했던 즈음이다. 남편은 내게 클래식 음악을 녹음해 온 테이프를 건네주곤 했다. [사진 unsplash]

남편과 도시로 향하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말수가 적어지고,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된다. 1984년, 남편이 내게 청혼했던 즈음이다. 남편은 내게 클래식 음악을 녹음해 온 테이프를 건네주곤 했다. [사진 unsplash]

우리의 눈은 산으로 강으로 나무로 꽃들로 흩어지고 사방이 유리로 개방된 차 안에서 술술 속내를 털어놓는다. 유치한 인간인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들, 부모지만 아직도 오롯이 살아 있는 ‘나’라는 존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상처받은 봄날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 관해도 이야기한다. 그러다 한 사람이 말수가 적어지고 침묵이 길어지면 차 속에 고요한 적막이 돈다. 그리고 기억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떠돈다.

1984년 광화문 종합청사.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은 퇴근 시간에 한 여성이 정부종합청사 건물을 나와 후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네모난 직사각형을 층층이 쌓아 올린 갑갑한 사무실을 벗어나오는 그녀의 발걸음에 해방감이 모래알처럼 묻어 있다. 청사 밖 후문 앞쪽에 낡은 세무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높은 청사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의 손에는 카세트테이프와 책이 한 권 들려 있다. 두 사람은 청사 후문 밖에서 만나 가벼운 미소를 나누고 같이 발걸음을 옮긴다.

정동 MBC 옆 ‘나드리’라는 카페에 앉아 클래식 음악을 녹음해 온 테이프를 받고, 그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의 시간은 광속으로 흐르고, 흐린 불빛 아래 안개처럼 음악이 흐르는 카페를 뒤로하고 막차가 끊길까 염려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가 준 책 속에는 항상 엽서 한장이 들어 있다. 이번 엽서에는 화가 김환기의 그림이 인쇄되어 있고 그 뒷면에는 시인 변영로의 ‘봄비’가 그의 글씨로 쓰여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 [사진 배일동]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 [사진 배일동]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변영로, '봄비'-

청혼한 그가 미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매일 저녁 나의 직장 앞에서 기다리며 앞뒤 60분을 녹음한 음악 테이프와 시가 적힌 그림엽서를 선물하던 시절이다. 우리가 부부가 되게 해준 그 시절의 애틋한 마음은 이제 우리의 일상 속 삶 이야기 뒤에 살짝 묻은 웃음으로 넘어간다.

남편은 청혼에 대한 나의 답을 기다리며 매일 직접 녹음한 음악 테이프와 시가 적힌 그림엽서를 선물했다. 그 시절 애틋한 마음은 이제 일상 속 삶 이야기 뒤로 넘어갔다. [사진 unsplash]

남편은 청혼에 대한 나의 답을 기다리며 매일 직접 녹음한 음악 테이프와 시가 적힌 그림엽서를 선물했다. 그 시절 애틋한 마음은 이제 일상 속 삶 이야기 뒤로 넘어갔다. [사진 unsplash]

진달래는 살짝 묻은 웃음 같은 꽃이다. 결혼하고 어느 시점마다 과거의 그가 부분부분 사라져갔다. 그 모습은 물감이 흐려져 바래가는 것 같기도 하고 한지로 바른 얇은 문이 한 겹씩 닫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둘 다 오십 중반이 된 요즘 우리 부부는 각자 화장실을 나올 때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올려 사인을 보내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꼬리를 옆으로 늘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와 나는 책과 음악으로 만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전생에 남매였나 하는 사이로 변해가고 있다. 마음이 편할 때는 “당신 덕이야” 하다가도 속이 꼬이면 “내 청춘 물어내!” 하는 표정을 짓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도시와 시골을 오가면서 나는 그를 점점 더 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점점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엇박자를 잘 놓던 그와 내가 일치할 때가 있다. 회갈색 나무를 배경으로 점점이 진달래 분홍 점이 찍힌 풍경을 볼 때다. 내가 그 꽃을 보며 “지옥 같아” 하면 “맞아” 하고, “천국 같아” 하면 “맞아” 하고, “햐! 고혹적이다” 하면 “맞아” 하고, “흠, 허무하다” 하면 “맞아” 한다. 길 위에서.

과거로부터 먼 미래까지 이어진 꽃

그와 나는 이 봄날 무엇이 맞는다는 것일까. 아련하고 애틋했던 지난 세월도 이제는 꽃 그림자처럼 흘렀다는 허무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허접한 껍질을 한 겹씩 벗어내며 말갛게 다가올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 진달래를 놓고 맞아, 맞아 하고 있다.

진달래는 시간을 늘리는 꽃이다. 과거로부터 먼 미래 영계까지 이어진 꽃. 긴 시간이 지금도 사라지고 있음을 색으로 보여주는 꽃. 책과 음악과 화장실을 이야기로 엮어 살짝 신화로 들어 올리는 꽃이다. 허무와 그리움 사이에 핀 진달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찍힌 흔들리는 꽃도장이다.

한순 시인·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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