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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국가’는 올드랭사인 선율에 실은 “동해물과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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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호 12면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⑦ 

서울 탑골공원 연주를 마친 대한제국 군악대. 1907년 이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탑골공원 연주의 마지막 곡이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사진 민경찬]

서울 탑골공원 연주를 마친 대한제국 군악대. 1907년 이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탑골공원 연주의 마지막 곡이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사진 민경찬]

‘가무(歌舞)의 민족’이라 일컬어 왔던 것처럼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노래’를 매우 중요시해 왔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으로 바꾸는 과정도 노래와 함께했고, 3·1운동 당시에도 노래가 널리 불리었으며, 광복군의 독립투쟁도 노래와 함께했다. 마침내 획득한 조국 광복의 환희도 마찬가지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노래가 늘 곁에 있었다. 1916년 하와이에서 발행된 ‘애국창가집’ 서문에 “사람의 마음과 국민의 정신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는 데는 노래가 으뜸”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노래에 대한 그런 생각을 실현하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애국가, 애국창가, 애국가요, 계몽가요, 독립군가, 독립운동가, 광복군가, 항일가요, 해방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3·1운동 때 애국가로 많이 불려져 #대한제국 때 수많은 ‘애국가’ 등장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 100여 편 #임정, 노래 통해 독립운동 전개

1914년 만주 학교 교과서에 ‘국가’ 수록  

3·1운동 당시 “대한 독립 만세!” 구호와 함께 가장 많이 울려 퍼진 노래는 ‘애국가’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가사는 지금과 거의 같지만 선율은 달랐다. 스코틀랜드의 민요 겸 찬송가인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이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3·1운동 때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한제국(1897~1910) 당시 이미 수많은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가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가’는 100여 편에 이르며, 실제 악보가 있는 것도 수십 편에 달한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대한제국은 ‘애국가의 나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수많은 ‘애국가’ 중에서 우리 민족은 유난히 대한제국 시대인 1907년에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라는 찬송가집에 수록된 ‘애국가’를 많이 불렀다. 바로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를 붙여 만든 ‘애국가’다.

1907년 윤치호가 채록해 펴낸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 가사. [사진 민경찬]

1907년 윤치호가 채록해 펴낸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 가사. [사진 민경찬]

누가 정한 것도 아니고 누가 부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 민족의 ‘국가(國歌)’처럼 불렀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한마음이 되어 3·1운동의 현장에서도 이 애국가를 목 놓아 불렀던 것이다. 실제로 3·1운동 전인 1914년 만주의 민족학교에서 발간한 음악 교과서에 이 노래가 ‘국가(國歌)’라는 제목으로 수록돼 있다. 이 노래가 여러 ‘애국가’ 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처럼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3·1운동의 현장에서도 단순히 하나의 노래가 아니라 ‘국가’로 불렸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가 범민족적으로 사랑을 받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애국가’를 새로 만들지 않고 이 노래를 임시정부의 ‘국가’처럼 활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노래는 더욱 더 사랑을 받게 되는데,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집약시킬 수 있는 정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 백성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이 노래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애창되었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곧잘 쓰이곤 한다.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지금도 이 노래를 ‘대한민국 국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한 ‘민족의 노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행한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가 ‘노래 정책’이었다. 노래를 통해 독립운동과 구국(救國)활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했다. ‘애국가’ 제정은 물론, 각종의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여러 애국지사가 공식적 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이들 노래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신문, 잡지, 노래집, 음악 교과서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그 때문에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항상 다양한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또 노래를 통해 독립의 정신을 더욱더 고취할 수가 있었다.

이 노래들의 공통된 주제는 당연히 ‘조국의 독립’이었다. “일본과 싸워 이겨 독립을 쟁취하자”라는 군가 스타일과 군사적인 내용의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웅담을 다룬 노래,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 실력을 배양하자는 노래, 망국의 비애를 다룬 노래, 조국과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이별의 노래, 독립운동 하다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노래, 조국 독립의 희망을 알리는 노래 등 다양했다.

민족혼 깨운 광복군가는 1000여 편 발굴

음악적인 측면에서 이 노래들은 새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기존 노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것이다. 가사에 맞는 노래의 선율을 그때그때 선택해 불렀기 때문에 음악적 정서가 매우 다양하다.

1940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의 창설과 더불어 ‘광복군가’가 등장했다. 기존의 독립운동 노래와 광복군가는 모두 조국의 독립을 노래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기존의 독립운동가는 주로 외국 노래의 선율에 조국독립의 내용을 담은 가사를 붙였는데, 광복군가는 대부분 새롭게 작곡했다. 광복군 안에 전문 작곡가가 있어서 많은 곡을 만들 수가 있었고 이를 통해 항일구국투쟁을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애국의 노래’ ‘독립의 노래’ ‘구국의 노래’ 등 광복군 노래도 다양한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만 하더라도 1000여 편이나 된다. 본격적으로 더 발굴한다면 수천 편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독립을 염원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며 희망을 주는 이런 노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둡고도 지난한 터널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의 역사와 민족혼이 스며있는 노래에 담긴 뜻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 영국 국가 연상시키는 대한제국 애국가

‘애국가’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풀면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한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를 가리키는 ‘국가(國歌)’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한다(愛)’는 말을 추가해 ‘국가(國歌)’의 존재 이유를 더 분명히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일반적인 의미로 풀면 ‘애국가’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다. ‘미국 애국가’ ‘영국 애국가’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우리의 경우는 ‘국가(國歌)’의 이름 자체가 ‘애국가’라서 다소 혼동을 가져온다.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제도를 정리한 책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대한제국 군악대의 연주곡목을 설명하면서 ‘대한 애국가’ ‘미국 애국가’ ‘영국 애국가’ ‘일본 애국가’ 등을 연주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미국 애국가’는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란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영국 애국가’의 공식 이름은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Queen)’이다. ‘일본 애국가’의 이름은 ‘기미가요(君が代)’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국가(國歌)’는 1902년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악보가 전해지고 있어서, 지난 2018년 대한제국 121주년을 맞아 서울 탑골공원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는 요즘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 달리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라는 구절이 주요 내용을 차지하는데,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를 연상시킨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애국가’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1896년 나필균 작 ‘애국가’, 제물포 전경택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의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 김종섭의 ‘애국가’,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의 ‘애국가’ 등이 알려져 있다. 이 많은 노래가 모두 ‘애국가’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노래들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애국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에 우리 백성들이 가장 많이 부른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노래가 ‘국가(國歌)’의 위상을 점차 확보하게 되었다. 정부가 먼저 특정 노래를 지정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부르면서 ‘국가(國歌)’가 되었다는 얘기다.

‘애국가’ 뿐만 아니라 ‘태극기’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3·1운동 때 갑자기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린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연속성을 지닌 상징물인 셈이다. 거국적 3·1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배경에도 그 역사성에 대한 존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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