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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전제, '임금 없는 성장'은 틀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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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13일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노동시장 격차 완화와 소득주도성장’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13일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노동시장 격차 완화와 소득주도성장’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전제…한국 경제 성장하는 데도 노동자 임금 정체했다?   

하나.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연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3.8%를 기록했지만, 같은 기간 실질 임금 증가율은 2.1%에 그쳤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에는 연평균 실질 성장률이 3.2%였지만, 실질 임금 증가율은 0.5%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저서 『한국 자본주의』에서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 데도 노동자 실질임금은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임금 없는 성장'은 국민 입장에서 무엇을 위해 경제성장을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둘. 국민총소득 중 가계소득 비중은 1990년 71.5%에서 2012년 62.3%로 축소됐다. 반면 기업소득 비중은 1990년 16.1%에서 2012년 23.3%로 늘었다. 이에 대해 장 전 실장은 같은 책에서 "가계 살림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은 기업이 경제성장의 성과를 더 많이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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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경제참모의 가설, 최저임금 29.1% 인상으로 연결    

위 두 가지 주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을 뒷받침한 핵심 전제다. 박종규 청와대 재정기획관과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 장 전 실장 등 현 정부 핵심 경제참모는 이 같은 분석을 근거로 노동자 임금과 가계 소득 인상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기업의 사내유보금을 환수해 노동자·가계 등에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했다.

전제는 정책 실험으로 이어졌다. 노동자 실질 임금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부터 2년간 최저임금이 29.1% 올랐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소득 증대를 위해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시행됐다. 최저임금 인상은 전반적인 노동자 임금 상승으로 연결됐다. 고용노동부 '사업체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올해 1월 상용근로자 1인당 평균 월급은 418만5000원으로 전년 같은 달 대비 8.6% 늘었다. 임시·일용근로자 월평균 임금(153만6000원)도 6.3% 증가했다.

노동자 임금은 올랐지만, 그만큼 노동시장에 들어와 일하기는 어려워졌다. 올해 3월 고용 동향에서 나타난 청년층 확장실업률(취업준비생 등 '사실상 실업자'를 보여주는 체감실업률)은 25.1%로 2015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았다. 제조업 취업자는 1년째 감소세다. 최저임금 인상 영향이 상대적으로 심한 도·소매업, 사업시설관리·사업지원·임대서비스업 등에서도 취업자 감소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반론…"'임금 없는 성장' 담론은 잘못된 통계 해석에 근거"   

경제학계에서 소득주도 성장의 핵심 전제에 '통계 해석의 오류가 있다'는 새로운 분석이 나와 파문이 일고 있다. '임금 없는 성장' 담론이 잘못된 통계 해석에서 출발했다면, 이를 근거로 추진 중인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시장 왜곡을 키울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어서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1일 한국경제학회 학술지 『한국경제포럼』에 게재한 논문 '한국경제의 노동생산성과 임금'에서 "실질 임금상승률이 취업자 1인당 실질 GDP 증가율보다 낮았다는 (박종규·장하성·홍장표 등의) 기존 문헌 주장은 '해석상의 오류'에서 출발한 것임을 확인했다"며 "오류를 교정한 결과 취업자 1인당 GDP 증가율과 임금증가율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임금 없는 성장'을 처음 주장한 학자는 박종규 청와대 재정기획관이다. 그는 2013년에 낸 보고서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질 임금성장률과 취업자 1인당 실질 GDP 성장률을 비교해 2007년 이후 임금증가율이 GDP 증가율을 크게 밑돌았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진보학계는 물론 보수 성향 경제학자들도 한국의 소득 양극화를 이해하는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

"오류 교정하면 경제 성장한 만큼 임금도 같은 수준으로 올라" 

그러나 박정수 교수는 새 논문에서 기존 주장은 '취업자 1인당 실질 GDP 성장률과 실질 임금 증가율'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물가 수준을 고려해 명목 GDP 성장률과 명목 임금 증가율을 실질 지표로 바꾸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물가 변수를 적용하다 보니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가령 실질 GDP를 구할 때는 명목 GDP를 생산물(산출) 기준 물가지수(GDP 디플레이터)로 나눴다. 그러나 실질 임금을 구할 때는 명목 임금을 소비자물가지수(CPI)로 나눴다. 통상 두 물가지수 간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05년 이후에는 소비자물가지수가 GDP 디플레이터보다 더 빠르게 상승했다. 이 때문에 이런 변수로 나눈 실질 임금 증가율은 취업자 1인당 실질 GDP 성장률에 밑도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반면 아무런 물가 변수를 적용하지 않은 취업자 1인당 명목 GDP 성장률과 명목 임금 증가율, GDP 디플레이터와 소비자물가지수 둘 중 하나만 적용해 실질 지표로 환산한 취업자 1인당 GDP 증가율과 임금 증가율은 별다른 괴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물가 기준을 동일하게 맞춰 오류를 수정하면 2000년~2017년 기간 동안 한국 경제가 성장한 만큼 임금도 같은 수준으로 올랐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비슷한 논의는 25년 전 미국에서도 있었다. 민주당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보스워스(Bosworth) 박사는 1973년부터 1993년 기간 중 미국의 연평균 실질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는 것보다 실질 임금이 더 낮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각각 다른 물가 지수를 적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같은 물가 지수를 적용하면 이런 괴리가 사라진다고 정리한 것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기업보다 가계소득 줄었다?…자영업 줄고 소형 법인 늘어난 탓" 

문재인 정부 경제참모들은 또 가계·기업·정부 중 기업이 소득을 더 많이 가져간 결과 가계소득이 줄었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소득주도 성장'의 당위성 입증 근거가 됐다. 그러나 박 교수는 새 논문에서 한국은행 기업체 자료를 토대로 기업의 인건비 비중이 꾸준히 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업이 임금 배분을 적게 해서 가계소득 비중이 감소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가계소득 중 임금 비중은 오히려 늘었고 자영업자 소득 비중이 줄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대신 10인 이하 소규모 법인이 늘어 기업소득 비중이 커진 점도 발견했다. 이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업 형태가 자영업에서 법인사업자로 변화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란 설명이다. 이 때문에 기업이 가계가 가져가야 할 몫을 '착취'했다는 기존 해석은 과도하다고 봤다. 기업소득 역시 국민연금·퇴직연금·펀드나 주식 투자 등으로 기업 주식을 보유한 가계가 나눠 갖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 소득이 외국인과 소수 자산가 계층, 저소득층 등에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보다 진전된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한국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박 교수 주장은) 일관성이 있는 내용"이라며 "정확한 데이터에 의존해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결론…"인위적 임금 올리기보다 생산성 높여 소득 늘려야"  

보수 성향 경제학계에서도 노동자 임금과 가계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 없이 인위적인 임금·소득 인상은 시장 왜곡만 키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올해 1분기 한국 경제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 이후 고용이 정체되거나 위축되는 배경도 이 때문이란 분석을 내놨다. 박 교수 주장처럼 지금까지도 노동자 임금과 가계 소득이 한국 경제가 성장한 만큼 늘고 있었다면, 기존 경제 성장 속도보다 가파른 임금 인상을 추구하는 '소득주도 성장'은 수정돼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전문가 일각에선 노동자 임금과 가계 소득을 늘리기 위해서는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 정책을 다시 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규제 혁신과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등이 이뤄져야 생산성과 소득이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노동 비용 인상이 국내 소비 여건을 개선하기보다 수출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있고, 기업의 고용 부담을 키워 투자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며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의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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