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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병'도 인정했다···대법의 친노동 판결, 文정부서 대폭 급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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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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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입장에 선 대법원 판결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3명의 신임 대법관을 임명하면서부터 예고됐다. 민변 회장 출신인 김선수 대법관(사법연수원 17기)을 비롯해 노정희(19기) 대법관 등이 진보 성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 대법관은 취임 전 “노동사건 판례들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하겠다”라고도 했다. 현재 14명의 대법관 중 9명이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인사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 2월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만 60세로 인정한 육체노동자의 노동가동연한을 만 65세로 상향할지에 대한 상고심 선고를 앞두고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 2월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만 60세로 인정한 육체노동자의 노동가동연한을 만 65세로 상향할지에 대한 상고심 선고를 앞두고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실제로 지난 8개월간 대법원은 노동 사건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가장 큰 변화를 몰고 온 건 ‘정년 65세’를 못 박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올해 2월)이다. 4살 아이가 수영장에 빠져 숨진 사건에서 대법원은 수영장 업체가 부모에게 ‘아이가 살아서 65세까지 일했다면 벌었을 소득을 기준으로 배상액을 책정하라’는 취지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법정 정년이 만 60세 이상으로 연장됐고, 실제 은퇴 연령은 이보다 훨씬 높아졌다”며 일선 법원에서 노동자 정년을 막연하게 60세로 계산해온 관행을 지적했다. 1989년 육체 가동 연한이 55세에서 60세로 조정된 이후 30년 만에 바뀐 판례였다. 이후 후속 판결도 잇따르고 있다.

 스트레스ㆍ정신질환ㆍ월요병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

대법원은 업무상 재해 범위도 더욱 넓히고 있다. 지난 11일 대법원은 19일을 쉼 없이 일한 뒤 세차를 하다 쓰려져 숨진 전세 버스 운전기사 김모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1ㆍ2심은 “업무 사이사이 휴게시간이 있었다”며 업무와 과로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장소도 마땅치 않고, 규칙적이지도 않은 대기시간을 온전한 휴식시간으로 보기 어렵다“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정신적 스트레스나 정신질환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는 추세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유성기업에서 노조 활동을 하다 우울증이 생긴 박모씨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2심 재판부는 ”박씨가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은 업무 수행 중 경험한 노사ㆍ노노 갈등과 회사 측의 부당한 경제적 압박, 강화된 감시와 통제가 더해져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직장인들이 겪는 ‘월요병’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나오고 있다. 2013년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던 김모씨는 월요일 오전 상담 전화를 받다가 갑자기 쓰러져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1심은 ”매주 반복되는 월요일의 업무량 증가는 10년 넘게 콜센터에서 근무해온 김씨에게 익숙해진 근무 환경이다”라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2심은 이를 뒤집었다. 2심은 “같은 근무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김씨는 오히려 월요일에 출근해 평소보다 과중한 업무를 소화해야 한다는 긴장감과 압박감이 더욱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사측이 낸 상고를 기각했다.

양지훈 변호사는 “과거에는 상해ㆍ재해가 인정되는 경우가 육체적인 것에 한했다면 정신질환이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상해 사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는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인정한 '근로자', 위탁 집배원ㆍ구두 제화공

재택위탁집배원들이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대법원 판결 기자회견에서 승소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중앙포토]

재택위탁집배원들이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대법원 판결 기자회견에서 승소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중앙포토]

근로자 인정 범위도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재택위탁 집배원 유모씨 등 5명이 대법원에서 ‘우체국 근로자’라는 판단을 받았다. 재택위탁 집배원은 1997년 IMF 사태 이후 생겨난 직군으로, 기존 집배원이 하는 업무 중 아파트 단지 등 특정 구역에 한해 우편 배달업무를 맡고 있다. 다만 우정사업본부 소속이 아닌 근무시간이나 배달량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도급계약’ 형태로 일해왔다. 대법원은 ‘명목상 도급계약을 맺었어도 다른 근로자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업무를 해왔다면 근로자가 맞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대법원은 다른 근로자 지위확인 사건에서도 ‘실제 일하는 방식’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회사가 갑의 위치에서 ‘도급 계약’을 맺어놓고 실제로는 자기 직원처럼 일하게 하는 편법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11월 구두 제화공 고모씨 등 15명도 대법원으로부터 근로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기존부터 함께 일해오던 구두회사 측에서 2010년 갑자기 일부 공정을 도급 계약으로 전환하며 퇴직금 등을 받을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앞서 2심은 작업 지시와 인사 관리를 회사에서 계속해온 점 등을 들어 이들을 근로자로 인정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 지었다.

최은배 변호사(엘케이비앤파트너스)는 “회사에서 지휘·명령이나 지시·감독을 받았느냐가 근로자임을 결정하는 판단 기준이지만, 이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판사 개개인이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대법원이 선고할 노동 판결에서도 대법원을 구성하는 대법관 개개인의 성향과 판단이 주요하게 작용할 것이란 취지다.

여전히 대법원 판결 기다리는 노동 사건들

다른 굵직한 노동 사건들도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낸 ‘태아 산재 인정’ 소송이 그중 하나다. 2009년 제주의료원 간호사 중 15명이 임신했지만 5명이 유산했고, 태어난 10명 중 4명이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났다. 유해한 약품 작업 등 간호사들이 놓인 특수한 업무 환경이 사고의 원인인지, 태아도 산재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 1ㆍ2심이 엇갈린 판단을 보이며 3년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들이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도 2년째 대법원에 머물러 있다.

박사라·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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