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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상생이냐 개발이냐, 시험대 오른 ‘박원순표 도시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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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기업 - 주민 - 상인 삼각함수에 길 잃은 상암 롯데몰

서울시 상암동 롯데몰 부지. 인허가가 늦어지면서 3개 필지에는 6년째 펜스가 둘러쳐져 있다. 오른쪽이 DMC역, 건너편이 상암동 아파트 및 업무 단지다. [중앙포토]

서울시 상암동 롯데몰 부지. 인허가가 늦어지면서 3개 필지에는 6년째 펜스가 둘러쳐져 있다. 오른쪽이 DMC역, 건너편이 상암동 아파트 및 업무 단지다. [중앙포토]

지하철 6호선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역 2번 출구로 빠져나오자 오른쪽 도로 건너편에 높은 펜스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펜스는 연이어진 3개 필지를 나눠 6년째 둘러쳐져 있다. 삭막한 풍경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목적이었을까. 펜스에 설치된 바람개비 같은 빛바랜 장식물이 오히려 황량함을 더하는 느낌이다. 펜스 틈 사이로 들여다본 부지는 무성한 잡초로 덮여 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롯데몰 부지다.

개발 전제 용지 매각 뒤 6년 미적 #롯데 측 “차라리 되사가라” 반발 #‘상생 우선해야’ 고수하던 박 시장 #최근 ‘인허가 절차도 병행’ 밝혀

이곳에는 기업 행위와 규제, 도시 행정 책임자의 개발 철학, 재래시장 상인들의 생존권, 주민들의 편익추구권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롯데쇼핑은 2013년 서울시로부터 2만644㎡ 부지를 1972억원에 사들였다. 본래 세 필지를 따로따로 팔 계획이었으나,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한꺼번에 매각했다. 롯데는 2017년 목표로 백화점·호텔·대형마트·영화관 등이 들어선 복합 쇼핑몰을 지어 서울 서북권의 랜드마크로 키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개발 계획이 서울시로부터 4번이나 퇴짜를 맞는 등 인허가가 늦어지며 애물단지가 됐다.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과 상생 방안이 합의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어제오늘도 아닌 일에 새삼 관심이 쏠린 것은 롯데가 3월 말 서울시에 보낸 공문 때문이다. 인허가를 신속히 진행해달라는 촉구 뒤에 “허가를 안 해줄 경우 서울시가 부지를 되사가라”는 강수를 던졌다. 일종의 ‘최후통첩’이다. 롯데 관계자를 만나 설명을 들어봤다. 시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자세는 조심스러웠다(요청에 따라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박원순. [뉴스1]

박원순. [뉴스1]

공문 내용이 이례적이다.
“서울시가 매각 당시 내건 용도는 ‘상업업무’로 돼 있다. 용지 공급 지침에도 관광호텔이나 대형 쇼핑몰을 적시했다. 이래 놓고는 6년이나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계약은 박원순 시장 취임 3년 차에 이뤄졌다. 이럴 거면 왜 팔았는지 모르겠다.”
주변 재래시장과 상생 방안이 미흡한 것 아닌가.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 등 재래시장 매출에 영향을 미칠만한 매장은 진작 포기했다. 서울시 중재와 상인들 요구로 세 필지 중 한 필지는 비판매시설인 오피스텔로 돌렸다. 대신 남은 두 필지를 ‘합필’해 개발하게 해달라는 게 우리 요구다. 당초 지하 통개발을 계획했으나 이것도 포기하고 지하통로만 연결하기로 했다. 구체적 사항은 상생TF가 재개되면 대화로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롯데의 안에 대해 인근 망원시장 상인들은 다른 입장이다. 상생TF에 참여했던 서정래 비대위원장(전 망원시장 상인회장)은 “롯데가 양보하는 척하면서 실속을 차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만하면 롯데가 양보한 것 아닌가.
“롯데가 한 필지를 비판매시설로 돌리고, 대신 두 필지를 합치겠다고 한다. 두 필지를 따로 개발하는 것과 합쳐서 개발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양보한 게 아니다. 대형마트와 SSM은 어차피 유통산업발전법 때문에 전통시장 주변에는 세울 수 없다.”
인근 주민들은 롯데몰 입점을 바라고 있다.
“대형 쇼핑몰이 생기면 주민들은 편리할 것이다. 아파트값도 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생존의 문제다. 망원시장 주변에는 이미 마곡 신세계 스타필드, 김포공항역 롯데몰, 삼송역 스타필드, 은평뉴타운 롯데몰 등이 들어섰거나 들어설 예정이다. 직선거리 2㎞에 복합 쇼핑몰까지 생기면 우리는 생업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용지 매입 후 롯데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인근 3개 상인 단체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협의 도중 상암동상점가 상인회, 마포농수산물시장 상인회는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남은 협의 대상은 사실상 망원시장 상인회 뿐이다. 망원시장 상인들은 2011년 인근 합정역 메세나폴리스 홈플러스 입점 때도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SSM(기업형 슈퍼마켓) 폐점, 재래시장과 겹치는 15개 품목 판매 제한, 시장발전기금 30억원 출연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롯데몰 문제는 송사로까지 이어졌다. 2017년 5월, 롯데가 서울시를 상대로 ‘부작위 위법 확인’ 행정소송을 냈다. 서울시가 적법한 행정 절차를 미루고 있다는 이유였다. 소송은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양측간 잠정 합의가 이뤄지면서 취하됐다. 롯데가 기존 계획을 포기하고, DMC역과 연계한 개발안을 다시 내기로 했다. 롯데 측은 “서울시 고위 관계자가 행정소송 취하 조건으로 우리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두 합의’에도 불구하고 수정안 재심사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가장 큰 쟁점은 두 필지 ‘합필’이었다. 상인회의 반대가 여전한 상태에서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게 롯데의 불만이다. 여기엔 박원순 시장의 ‘철학’ 혹은 ‘고집’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박 시장은 지난해 9월 시의회에서 롯데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질의에 대해 “그래도 상생이 먼저”라고 답했다. 박 시장의 뜻을 확인한 서울시 실무진들이 다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는 게 롯데 측 시각이다.

최근 박 시장 자세가 다소 바뀌었다는 신호도 나오고 있다. 롯데의 공문 발송 이후 박 시장은 지난달 10일 서울시 김기덕 의원(민주당, 마포 4) 등과 롯데몰 관련 면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앞으로 인허가 절차는 상생 협의와 병행해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배석한 실무진들에게도 이런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김 의원 등은 “상생이 전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라고 재확인까지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선(先) 상생, 후(後) 승인’이 ‘병행’으로 방향을 튼 것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르면 상반기에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열어 롯데몰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와 롯데의 신경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롯데는 문서 형태의 답이 없으면 자신들이 먼저 안을 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서울시는 롯데가 마포구에 주민제안 형태로 새로운 안을 제시하면 심의절차를 시작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이다. 말하자면 서로 먼저 패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최진석 서울시 도시관리과장은 “우리도 기업 요구와 인근 주민들 민원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협의할 방침”이라면서도 “위원회 결정은 전문가들 영역이어서 서울시가 통과를 확답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양측의 갈등에도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쇼핑몰 개발은 인근 상암·수색·증산 지구 개발 계획과도 연계돼 있다. 계약을 파기할 경우, 길고 복잡한 인허가 진통을 감수할 기업이 나타날지도 의문이다. 롯데로서도 복합 쇼핑몰이 만들어지면 사업성은 충분하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지하철 6호선과 공항철도, 경의선이 만나는 교통 요지인 데다, 인근 수색·증산 지구와 고양시 향동 등 배후 입지 개발도 한창 진행되고 있다. 장기간 끌어온 계획이 무산될 경우, 복잡한 소송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도 양측 모두 부담이다.

사업이 늦어지면서 인근 주민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김병식 상암동아파트연합회장은 “주변에 망원시장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거의 없다”며 “객관적인 영향이 확인되지도 않는 마당에 재래시장 핑계로 미적대는 박 시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보듯 대형 복합몰이 개장하면 유동인구가 늘어나 지역 상가가 오히려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쇼핑몰 하나 못 세우면서 어떻게 강남-북 균형 발전을 이야기하나”는 댓글이 붙고 있다.

박 시장은 ‘상생’을 자신의 시정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다. 망원시장-홈플러스 갈등 때는 상인들 편에 서서 ‘골목시장’ 지키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복합 쇼핑몰은 편의점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근 주민 90% 이상이 쇼핑몰 건립을 찬성하는 것도 부담이다. 강북 개발과도 연관된 문제다. 박 시장이 살짝 입장 변화를 보인 것도 이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의 도시개발 철학이 급변침할 리는 없다. 기업-상인-주민 간 삼각함수 난제 속에서 박원순 시장의 선택은 과연 어디로 향할까.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