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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책을 정리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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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직업이 교수니 책이 모인다. 필요해서 사기도 하고 언젠가 필요할 듯해서, 또 혹은 제목과 저자에 끌려서 사기도 한다. 받는 경우도 많다. 선후배들이 자기가 썼다고 혹은 만들었다고 책이나 CD를 보내온다. 책 얘기를 하고 있지만 실은 나에겐 악보와 음반이 책만큼이나 많이 모인다. 재직한 기간이 30년 넘으니 그렇게 해서 모인 책과 악보와 음반이 연구실을 꽉 채운다.

나 자신을 형성한 책은 동반자 #그 책들과 더불어 나의 길 더듬어 #지금의 내가 된 것이리라

정년퇴임이 가까워져 오자 그 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선배들 중에는 도서관에 기증한 이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일 년가량 연구실을 열어놓고 누구든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해서 많이 짐을 덜었다고도 했다. 도서관에서 반가워할 만큼 귀중한 자료도 없고 책 외에는 별로 모아둔 것이 없는 처지에 앞으로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을 무작정 버리는 것이 내키지 않아 1년여 동안 조금씩 정리를 했다.

제일 먼저 버린 것은 잡지. 음악·예술 관련 잡지가 많지는 않아도 정기적으로 받으면 그 역시 무시 못 할 양이어서 이미 오래전부터 모으지 않았었다. 그래도 관련 기사나 글 중에 참고할 것이 있어 남겨둔 것이 한 짐이었다. 학술지의 경우에는 종종 글의 제목이 차마 책을 버릴 수 없게 만들곤 했지만 눈 딱 감고 버렸고, 내 글이 실린 잡지는 끝까지 남겨 두었다가 결국 그마저도 “에잇”하고 폐기했다.

다음으로 쉽게 버린 것은 복사본들. 한때는 귀한 자료가 있으면 그것을 몇몇이 같이 복사하여 책을 만들어 가지곤 했다. 심지어 출판사들은 그런 식으로 만든 해적판의 책·악보를 학교마다 팔러 다니기도 했다. 솔직히 그런 책·악보를 통해 얻은 바가 적지 않았지만 다 아웃시켰다.

증정본으로 받은 책을 버리는 데에는 약간의 분류가 필요하다. 내가 읽은 책, 읽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서명이 들어있는 책, 그저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중 마지막 경우는 과감히 버린다. 저자의 서명이 있는 경우는 고민을 하다 버린다. 읽은 증정본은 생각해 보고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인가를 가려 버린다. 정년퇴임을 했지만 아직 글도 쓰고 곡도 쓴다. 이따금 강의도 한다. 그러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책이나 자료의 도움도 필요하다. 필요한 것은 단 한 줄, 단 한 페이지일 때가 많지만 바로 그것을 위해서 그 한 권이 필요한 것이다.

한 6개월 그렇게 정리했지만 별로 그 양이 줄지 않았다. 퇴임 후 들어갈 작은 개인 작업실로 옮기기에는 아직 너무 많았다. 친구의 충고를 듣기로 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면 그 책을 앞으로 읽을 가능성은 없다. 버려라.” 나의 경우 10년 동안 읽지 않다가도 간혹 열어보기도 하므로 일단 구입해 놓고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들을 버리기로 했다.

마음 아픈 경우가 생겼다. 언젠가 공부해 보리라 설레면서 구입했던 책들, 새것처럼 장정도 견실한 책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던 책들…. 아까워서 후배나 학생들에게 주기도 했지만 하다 보니 그 자체가 또 일이었다. 버렸다. 한 번 모질게 마음을 먹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책장이 쉽게 비어갔다.

반 넘어 서가를 비운 후 정년퇴임을 맞았다. 개인 작업실로 책과 자료를 옮겼다. 책을 완전히 풀기도 전에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이 되었다. 나름 바쁘고 공부도 필요한 일이어서 사무실의 서가에 자료가 하나둘 쌓였다. 이번에는 주로 악보와 DVD 자료였다. 5년 후 단장직을 마치고 새로운 작업실을 얻어 이사를 했고 집으로 책을 옮기기도 했다. 책 짐을 쌀 때마다 책은 줄었다. 최근에는 집에 있는 책도 정리를 했다. 그리고 집과 작업실의 서가에 책들을 정리해서 꽂고 보니 제법 단출해졌다. 잡다하게 나를 둘러쌌던 것을 벗겨내고 큰 줄기의 나를 보는 기분이랄까?

몇 차례의 퇴출 고비를 넘기고 여기까지 따라온 책들을 보니 용했다. 최근 자료도 있었지만 의외로 오래된 책들도 많았다. 어떤 것은 40년이 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읽은 책, 그 내용에 의해서 나의 생각과 마음이 형성된 책, 혹은 악보들. 그것들은 나를 형성한 원료였고 나의 기억 혹은 흔적이었다. 그것들과 더불어 나의 길을 더듬어 와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리라.

오래된 책 중에서 황지우의 시집 『나는 너다』를 찾아 첫 장을 펼친다. “1987년 새봄에” 라고 쓰여 있고 그가 서명을 했다. 책을 열어 새삼 첫 시의 몇 구절을 읽는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 /일어나 또 가자. /.... /지금 나에게는 칼도 경(經)도 없다. /경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