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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 묘미 더해주는 B급 언어와 몸짓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인근의 당구 오디세이(4)

고흐의 '밤의 카페(Vincent van Gogh, 1888, Oil on canvas)'에 등장한 당구대. 당구는 귀족 스포츠로 유럽에서 시작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그림 yale university art gallery]

고흐의 '밤의 카페(Vincent van Gogh, 1888, Oil on canvas)'에 등장한 당구대. 당구는 귀족 스포츠로 유럽에서 시작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그림 yale university art gallery]

본래 귀족 스포츠로 유럽에서 시작된 당구는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된 후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1970, 80년대 1차 베이비부머들 사이에 당구 붐이 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당구장은 끓는 피를 발산할 데가 별로 없었던 청춘들의 치기와 무례함이 통하던 해방구였다. 당구가 대중화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조금은 거칠고 오락성이 가미된 B급 문화로 흐르게 된 것은 이런 연유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이 점이 역설적으로 당구의 대중화에 기여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레스토랑보단 선술집이 좋은 B급 성향

사실 나는 B급 문화가 편하고 좋다. 내 천성이 점잖기보다는 경박한 편이고, 완곡하게 감추기보다는 직설적으로 들이대는 것에 익숙하고, 형이상학적인 것보다 형이하학적인 것에 쉽게 빠져드니 천상 B급 성향인가 보다. 내게 B급이란 비싸고 불편한 정장이 아니라 싸지만 편안한 일상복 같은 것이고, 와인이 어울리는 격식 있는 레스토랑이 아니라 소주·막걸리가 어울리는 왁자한 동네 술집 같은 것이다.

당구 문화의 B급적 단면을 살펴보자. 내가 당구를 배우던 시절엔 대부분의 당구 용어는 일본말이었다. 우리말 용어가 있긴 했다. 이게 하필 ‘X창(사각 모서리)’ 이란 형이하학적 용어다. 하지만 우리가 당구장에서 소싯적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맛있는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아 그거, X창 찍으면 되겠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해도 비위가 상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보다 입에 착 감기는 용어도 없으니 당구 칠 때의 언어 표현은 다소 정제되지 않은 것이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당구는 'B급 정서'가 더해지면 더 찰진 재미가 있다. 주저함 없는 용어, 자세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김상선 기자

당구는 'B급 정서'가 더해지면 더 찰진 재미가 있다. 주저함 없는 용어, 자세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김상선 기자

‘B급 행위’도 있다. 목표로 한 공에 내가 친 공이 맞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몸 쓰기’(속칭 몸 ‘히네루’ 라고 불린다. 히네루는 당구에서 회전을 의미하는 일본어이지만 실제 의미는 비틀기다)를 한다. 샷하고 난 직후 공의 궤적을 따라가며 몸을 쓰는 것을 말한다. 몸 쓰기가 심한 경우 샷을 하자마자 상체를 와락 비틀고 다리를 차며 심지어 큐대까지 냅다 휘두르게 된다. 나도 그 경망스러운 위세에 몇 번 인가 걷어차이거나 안경이 떨어져 나갈 뻔한 경험이 있다.

그런 다음 상체를 비틀고 목을 늘려 가며 공을 쫓아간다. 이는 자기 샷에 작은 실수가 있을 때 혹시나 하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수의 경우 요행으로라도 그저 맞기만을 기대하는 안쓰러운 몸짓이다. 하지만 몸을 비틀면 정말로 내 공에 회전이라도 들어간 양 맞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럴 때 ‘앗싸’하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이런 묘미 때문에 몸 쓰기를 안 할 재간이 없다. 다른 종목에 비해 유난히 몸 쓰기가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당구에 내재 되어있는 B급 속성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에게 B급 속성이란 게임에 지고도 웃는 비범한 절제가 아니라, 지면 얼굴이 붉어지는 (그렇다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을 말한다. 사실 약간의 몸 쓰기나 안 맞았을 때의 아쉬워하는 몸짓, 이를 보고 웃는 표정은 오히려 당구 경기에 재미를 더해주는 소스가 되기도 한다.

당구장에 걸린 당구 관련 포스터들. 세계 탑 랭커, 미녀의 사진은 당구장의 상징이다. 최정동 기자

당구장에 걸린 당구 관련 포스터들. 세계 탑 랭커, 미녀의 사진은 당구장의 상징이다. 최정동 기자

당구장에 가면 대개 유명 당구 선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몇 해 전 당구 전용 TV가 개국해, 덕분에 우리는 세계 탑 랭커들의 이름과 얼굴을 잘 알고 있다. 그 옆에는 여성 포켓볼 선수가 허리를 숙인 자세로 당구를 치는 사진도 함께 있다. 옛날 기억을 되살리면, 당구장에 걸린 사진의 대부분은 멋진 금발 머리 여성이 큐대를 잡고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데, 그 시선은 당구공이 아니라 당구장 손님이었다. 나는 경기 중 상대방이 치는 동안 그런 사진 앞에서 서 있곤 했다.

당구가 국제 공인 스포츠로서 제정되지 못한 이유는 적어도 수십 개 이상의 나라에서 여성 플레이어가 활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당구가 가장 활발한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여성들의 당구장 방문이 흔치 않은 것을 보면 당구는 아무래도 마초적 남성 스포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젊은 여성들도 당구를 즐기고 있으나 대개 캐롬이 아니라 포켓볼이라 그 결을 달리한다.

마초의 추억 반추하며 항거하는 자세로

나는 그러한 남성적 놀이 또는 스포츠로서의 캐롬볼 당구를 즐긴다. 어쩌면 꼰대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마초적 B급 문화를, 옛날의 아스라한 추억과 기억을 은밀히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부장적 직위를 오랫동안 고수해 오다 은퇴 후 이제는 가사일 – 설거지, 빨래 걷고 개기, 청소하기 등 – 에 충실하지 않으면 괜찮은 밥상 받기가 어려워진 현실을. 머리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섭섭함이 드는 이 초라한 시기에 나는 동병상련의 친구들과 마초의 추억을 반추하며 마치 항거하는 자세로 큐대를 잡는다.

깨알 당구 팁

큐대의 성질과 가격은 제각기 다르다. 요즘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맞춤형 큐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진 pixabay]

큐대의 성질과 가격은 제각기 다르다. 요즘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맞춤형 큐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진 pixabay]

큐대의 몸통은 단풍나무, 끝은 가죽
당구 큐도 포켓볼 용, 캐롬볼 용으로 구분된다. 길이와 무게에 대해 특별한 제한 규정이 있지 않아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길이는 137cm~147cm, 무게는 450g~ 650g 정도. 당구 큐에는 유연성과 내구성이 좋은 단풍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같은 소재라도 절단 부위라든지 (예를 들면 나이테 중심 부분) 연마·건조 등의 제작 방식에 따라 큐대의 성질이 달라지고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큐대 끝은 팁이라 불리며 가죽으로 만드는데, 돼지가죽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인다. 구조는 상대와 하대로 나뉘며, 하대 손잡이 부분에서 상대 끝으로 갈수록 지름이 좁아지는 원통형 구조로 돼 있다. 당구 칠 때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지 않도록 자세의 안정성을 용이하게 해주고, 임팩트 시 힘의 균형이 분산되지 않도록 해준다. 요즘엔 많은 동호인이 개인 전용 큐대를 사용하고 있다.

이인근 전 부림구매(주)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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