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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자' 청설모가 골프장에서 조용히 사라진 이유 뭘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민국홍의 19번 홀 버디(27)

 제15회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이 개최되었던 몽베르 CC 9번 홀. [사진 대유 몽베르컨cc 홈페이지]

제15회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이 개최되었던 몽베르 CC 9번 홀. [사진 대유 몽베르컨cc 홈페이지]

동물왕국이 살아있는 골프장이 있다. 지난 21일 끝난 2019년 KPGA 개막전인 ‘제15회 DB 손해보험 프로미 오픈’이 열린 대유 몽베르 CC다. 경기도 포천 명성산 자락 500고지에 위치한 36홀 골프장인데 근처에 산중 휴양 호수로 유명한 산정호수가 있다.

대회 레프리(경기위원)로 출장 나와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었다. 큰 사변에 가까운 뉴스다. 사람들이 외래종이라고 싫어하던 청설모 군단이 완전히 철수하고 귀여운 다람쥐가 이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람쥐보다 몸집이 3배나 큰 데다 먹성도 좋아 다람쥐의 삶을 어렵게 만들던 청설모가 사라지다니! 대회에 나와 레프리로 활약하던 중 틈틈이 한 캐디와 그린키퍼로부터 몽베르 골프장의 동물왕국 이야기를 들었다.

레프리로 구성된 경기위원회는 대회 전날 오후 골프장에 나가 대회 코스인 브렝땅 에떼 코스를 점검했다. 확인해보니 몇 개 홀 그린 뒤쪽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잔디가 마치 밭을 갈아놓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 멧돼지들이 지난해 늦가을 골프장에 내려와 먹이를 찾느라 파헤쳐 놓은 상흔이었다. 피해 범위가 꽤 넓었다. 경기위원회는 이 지역을 비정상적인 코스 상태로 지정하고 흰 페인트로 주변에 원을 둘렀다. 선수들은 볼이 이곳에 정지하게 되면 무벌타로 구제를 받게 된다.

코스답사를 했던 다른 레프리 이야기를 들어보니 36호 코스 곳곳이 멧돼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좀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다음날 대회 첫날인 18일 3번 홀에 배치된 포어캐디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1, 2, 3번 홀을 책임지는 레프리였고 몽베르 CC에만 10년째 일하는 김유미 캐디는 포어캐디를 맡아 3번 홀 세컨드 지점에서 깃발로 선수들이 친 볼이 아웃오브바운즈(OB)인지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멧돼지 출현으로 파놓은 밭처럼 피해를 입은 대회 코스 3번 홀 그린 뒤. [사진 민국홍]

멧돼지 출현으로 파놓은 밭처럼 피해를 입은 대회 코스 3번 홀 그린 뒤. [사진 민국홍]

나는 “멧돼지가 그렇게 많아요? 그런데 뭘 먹으러 내려와요?”라고 물었고 그는 “멧돼지 천지에요. 지렁이를 잡아먹으러 오지요.”라고 답했다. 그는 그린 뒤에는 지렁이가 아주 많다고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골프장 건설에 늘 반대해온 일부 환경론자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게 있다. 골프장이야말로 환경에 신경을 써 가장 낮은 저독성 농약을 치는 데 반해 논농사와 인삼밭은 고독성 농약을 뿌리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야기 봇물이 터졌다. “그런데 경기위원님, 청설모가 사라진 것 아세요? 골프장에는 도토리 상수리나무가 많고요. 심어놓은 잣나무도 있거든요. 먹거리는 풍부한데 이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정말 이상했다. 그동안 골프장에서 운동하다가 청설모를 마주치는 일이 흔했다. 조금은 박쥐의 모습이 있는 청설모는 징그러워 보였고, 이들 때문에 다람쥐의 개체 수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얄미워했었다. 아무튼 토종다람쥐 왕국이 재건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는 이어 까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사실 골프장에 들어오면서부터 곳곳에서 가악거리는 바리톤 저음을 듣고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의 이야기는 어느 때부터 까치가 줄어드는 대신 까마귀 개체 수가 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까마귀가 6대 4로 까치보다 많다고 한다.

까치는 한때 좋은 소식을 알리는 전령으로 여겨져 나라 새 정도로 대접받던 조류이다. 그러나 요즘은 집단적인 공격성이 알려진 데다 전봇대에 둥지를 틀어 합선사고를 일으키는 사고뭉치 새로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까마귀는 고대신화에서는 태양 안에 사는 삼족오로 숭배받던 조류인데 골프장에서는 골칫덩어리로 여긴다. 까마귀들이 골퍼가 친 볼을 물어가기 때문이다.

3번 홀에서 포어캐디를 본 김유미 씨는 골프장 동물왕국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3번 홀에서 레프리를 하면서 김유미 씨로부터 몽베르 CC의 동물왕국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민국홍]

3번 홀에서 포어캐디를 본 김유미 씨는 골프장 동물왕국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3번 홀에서 레프리를 하면서 김유미 씨로부터 몽베르 CC의 동물왕국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민국홍]

사실 경기위원회는 이 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선수들이 친 골프공을 까마귀가 물고가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목격자가 없으면 그 볼을 분실구로 처리해야 하고 선수는 1벌타를 받고 직전에 친 자리로 돌아가 다시 샷을 해야 한다. 실제로 갤러리가 없는 골프대회 예선전(먼데이 대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는데 선수들은 죽을 맛이다.

포어캐디는 이 골프장에서만 10년째 일하다 보니 골프장 구석구석 동물왕국의 비밀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는 “골프장이 휴장하는 날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페어웨이가 온통 노루와 고라니 똥밭이 돼요.”라고 전했다. 노루는 제주도나 비무장지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좀 놀랐다.

대회 코스가 아닌 남쪽의 다른 18홀 코스에는 오소리들이 산다. 이들은 텃새가 되어 연못 주변에 사는 원앙새 등을 먹이로 삼는다고 한다. 대회 코스 13번 홀에는 산토끼 가족도 사는데 천적이 많지 않아 제법 번성하고 있다. 황조롱이 등 가금 맷과의 맹금류도 있지만, 산토끼에게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달라진다. 뱀들이 엄청 번식해서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캐디들도 가을이 되면 공을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5월이 되면 꿩 가족의 나들이로 목가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5, 6월 산란기가 지나면 암꿩이 갓 태어난 꺼병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다. 골프를 치다 보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그 즐거움이 배가 되는데 5, 6월이면 특별한 자연의 선물이 제공된다.

몽베르 골프장도 예외가 아니다. ‘홀딱벗고’ 새가 출현해서다. 검은 등 뻐꾸기인데 울음소리가 그렇게 섹시하게 들린다. 나는 다음날인 19일 오후 늦게 한 그린키퍼를 만나 청설모가 사라진 이유를 물었다. 그는 “청설모가 황소개구리처럼 한국토양에 맞지 않는 모양이에요. 아마도 기후 탓인가 봐요”라고 답했다.

대회는 21일 이태훈 선수가 우승하면서 잘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념에 잠겼다. 참으로 골프장의 생태계가 건강하다고 생각되었다. 청설모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증을 떨칠 수 없었다. 또 까치가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알았다. 청설모가 국산 토종이라는 사실을.

민국홍 KPGA 경기위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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