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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2000년 전 로마인과 21세기 한국인의 공통점은 목욕 문화 즐기는 거죠

중앙일보

입력

“우리 집 아래층에 공중목욕탕이 있다. 정말 참기 힘든 갖가지 소음을 떠올려보라. 목욕탕 울림이 좋아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물을 심하게 튀기며 탕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음료수를 파는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있는데 소시지 장수, 빵, 과자 등 갖가지 음식을 파는 행상인이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목청껏 손님을 모은다.” 읽어보니 어때요. 여러분이 어제 다녀온 목욕탕 이야기 같다고요. 놀라지 마세요. 이 글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목욕탕 170개가 있었던 도시 로마에 살던 세네카가 쓴 겁니다. 오늘날 우리 목욕탕 현황은 어떨까요. 지난 4일 서울시 시민건강국 질병관리과를 통해 파악한 ‘목욕장업’ 현황을 보죠. 서울 기준 1960년대에 만든 업장 중 현재도 운영하는 곳은 15개예요. 서울 시내 전체 933개 업장 중 약 16%에 불과하죠.

엄마·아빠 어릴 적 가던 목욕탕 타임머신 대신 버스 타고 가볼까요

글=강민혜 기자 kang.minhye@joongang.co.kr, 사진=송상섭(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노효은(파주 와석초 6)·정아인(하남 위례초 6)·정하민(인천 용현남초 5) 학생기자, 참고 도서=『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단오풍정’에는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이 나온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단오풍정’에는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이 나온다.

통계청이 2016년 조사한 ‘가장 많이 이용한 여가공간’ 목욕탕·찜질방·수영장 항목 중에선 ‘목욕탕’을 고른 사람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중 15~19세는 목욕탕·수영장·찜질방 순으로 골랐는데요. 소중 학생기자단 의견은 어떨까요. 노효은(초6) 학생기자는 ‘목욕’ 하면 ‘때 밀기, 여러 탕, 목욕, 음료수, 삶은 계란’이 떠오른다고 답했습니다. 목욕탕·찜질방 모두 좋아하고 가족과 방문하며 이틀에 한 번 샤워를 하죠. 할머니가 가시는 목욕탕을 따라 다닌 정아인 학생기자(초6)는 일주일에 다섯 번 샤워하고 피곤할 때 피로를 풀러 찜질방에 가고 싶다고 해요. 정하민 학생기자(초5)에게 목욕탕은 그림책으로 배운 낯선 곳이지만 찜질방은 좋아하고, 샤워는 일주일에 5~7번 합니다. 세 학생기자 모두 집에 욕실이 있어 원하면 언제든지 씻을 수 있습니다. 과거엔 어땠을까요. 우리 조상도 1세기 로마인처럼 자유롭게 목욕탕에 다녔을까요.

1 왕이 온탕에 갔다는 기록이 있는 삼국사기(왼쪽)와 ‘고려인들은 하루 에도 서너 차례 목욕을 즐겼다’는 내용 이 실린 고려도경. 2 조선 시대 지체 높은 이들은 목간통 (沐間桶)을 사용했다. 나무로 만든 둥 근 욕조인 셈이다. 사진은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 나온 장면.

1 왕이 온탕에 갔다는 기록이 있는 삼국사기(왼쪽)와 ‘고려인들은 하루 에도 서너 차례 목욕을 즐겼다’는 내용 이 실린 고려도경. 2 조선 시대 지체 높은 이들은 목간통 (沐間桶)을 사용했다. 나무로 만든 둥 근 욕조인 셈이다. 사진은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 나온 장면.

우리의 목욕 역사 중 가장 오래된 ‘밖에서 한 목욕 기록’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비 알영의 탄생설화에서 찾을 수 있어요. 알에서 태어나 동천에서 목욕한 박혁거세의 몸에서 광채가 났고, 북천에서 목욕한 알영은 부리처럼 생긴 입술을 떼어 냈죠. 물에 ‘씻어낸다’는 건 ‘정화’ 의미가 있어 목욕은 신화에서 대개 마법을 부리는 통과의례처럼 사용되곤 했습니다. 현재 청결을 위한 일상적인 일이 된 것과 달리 특수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경우가 많았죠. 예를 들어 제사나 종교의식에서 사제가 신과 교감하기 위해 필수 과정으로 목욕을 했어요. 신성한 정화의식이었던 목욕은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자리 잡으면서 대중화됐죠. 이때도 위생 목적이 아닌 종교의식이라 공중목욕탕은 동네 어귀가 아닌 절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죄수에게 ‘정화’ ‘특수 목적’을 띈 목욕 벌을 내리기도 했죠. 신라 귀족 다수가 목욕시설을 갖춘 저택에 살았다는 걸 글이 아닌 우리 눈으로 확인할 기회는 안타깝게도 아직은 없습니다.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석조 욕조가 출토됐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경주시청 공보과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문의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죠. 당시 귀족들은 복숭아꽃을 띄우고 향료를 넣어 목욕을 즐겼으며 온천욕도 유행했어요.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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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뿐일까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를 보면 서천왕 17년(286)에 왕이 병을 사칭하고 온탕에 갔다는 기록이 있고요. 고려 역시 불교의 영향으로 많은 백성이 몸을 씻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문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들은 하루에도 서너 차례 목욕을 즐겼으며 사찰뿐 아니라 개성의 큰 강이나 냇가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구절이 있죠. 의식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역대 왕들의 온천 행사에 대한 기록이 있고요.

평소 쓰는 목욕용품을 착용한 정하민 학생기자.

평소 쓰는 목욕용품을 착용한 정하민 학생기자.

온천욕 관련 기록은 조선 시대로 이어집니다. 의식 수단이었던 목욕은 이때부터 질병 치료, 예방의학 개념이 가미됐죠.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신라·고려와 달리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면서 개방적이던 목욕 문화도 위축됐어요. 서민들은 냇가에서 목욕하고 사대부는 실내에 설치한 목욕소를 이용했죠. 주로 안방 또는 사랑방에 오늘날 욕조 개념인 목간통(沐間桶, 나무로 만든 둥근 욕조)을 두고 물을 받아 난탕(蘭湯)·창포탕(菖蒲湯) 등을 즐겼습니다. 고려 시대까지는 옷을 벗고 씻었지만, 노출을 꺼리는 생활관습 때문에 남녀 모두 목욕용 옷을 입은 채 신체 일부를 씻는 방식으로 바뀌었고요. 조선 초기엔 쌀겨·녹두·콩·팥가루를 비누처럼 거품 내 사용한 기록이 있죠. 또, 한증막(汗蒸幕, 오늘날 사우나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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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목욕 문화는 백제왕이 불상·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됐습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시대에 발달한 증기욕(蒸氣浴)도 일본에 퍼졌죠. 유교 영향으로 자취를 감춘 공중목욕탕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때 활기를 찾습니다. 삼국시대 일본으로 전파된 국내 목욕 문화가 다시 국내로 들어온 셈이죠. 여러분이 익숙할 형태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문을 열었어요. 하지만 모르는 사람끼리 발가벗고 목욕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유교 문화에선 곧 영업을 끝냈죠. 조선 왕실에는 1919년에야 목욕실을 설치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별도 목욕시설이 없었어요. 국왕의 침실 옆 작은 방에서 평소엔 세수를 하고 목욕할 때는 수백 년 된 통나무를 파서 만든 목간통을 뒀죠. 역시 목욕용 옷을 입었고요. 일제강점기 최초의 공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 생겼고, 1925년에는 서울에도 만들어지죠. 조선에 있었지만 조선인보다는 일본인이 주로 썼죠. 조선인이 공중목욕탕에 일본인들과 들어갔다가 ‘물건이 없어진 원흉’이라는 누명이라도 쓰는 날엔 큰일 나기 때문이에요. 일제가 괜한 일을 핑계 삼아 험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거든요.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목욕도 그렇다

2 팔미라 전경.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 뒤로 도시의 중앙로인 열주대로(列柱 大路)가 보인다. 대로의 주랑에는 가게 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3 영국 바스(Bath)의 로마 목욕탕 대 욕장. 로마제국이 영국을 지배했던 1세 기에 지었다. 과거 로마 목욕탕에서는 운동도 할 수 있었다. 눈여겨볼 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목욕을 운동에 수반 되는 과정으로 여겼다면 로마인들은 목욕을 더 좋아했다는 점이다. 공중목 욕탕에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 만 선택의 문제일뿐 필수적으로 거치 는 과정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2 팔미라 전경.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 뒤로 도시의 중앙로인 열주대로(列柱 大路)가 보인다. 대로의 주랑에는 가게 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3 영국 바스(Bath)의 로마 목욕탕 대 욕장. 로마제국이 영국을 지배했던 1세 기에 지었다. 과거 로마 목욕탕에서는 운동도 할 수 있었다. 눈여겨볼 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목욕을 운동에 수반 되는 과정으로 여겼다면 로마인들은 목욕을 더 좋아했다는 점이다. 공중목 욕탕에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 만 선택의 문제일뿐 필수적으로 거치 는 과정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의 황금시대인 기원전 5세기에 목욕 습관이 자리 잡았습니다. 귀족은 여러 방식으로 몸을 깨끗하게 관리했어요. 눈에 띄는 시설은 세면대 ‘라브룸’이죠. 욕실에는 다리를 뻗을 수는 있지만 드러눕지는 못할 정도의 크기 욕조도 있었고요. 집에 욕실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날마다 인근 우물을 이용하거나 가끔 공중목욕탕에 갔죠. 공중목욕탕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곳도 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곳도 있었는데 무료거나 요금이 저렴했습니다.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공중목욕탕에서는 불로 물을 데워 공급했고 필요할 때면 욕실에 화로를 피워 난방했죠. 가장 호화로운 공중목욕탕에는 냉탕·온탕·증기탕이 따로 있었고요. 이때 공중목욕탕의 장점은 사교성이었죠. 귀족은 공중목욕탕 원형 욕실에 30개까지 놓인 개인 욕조 중 아무거나 골라 목욕했는데요. 서로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주사위놀이나 공기놀이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목욕 도우미는 손님들에게 나뭇재나 흡수성이 좋은 백토 따위의 목욕제를 내주었죠. 부자들은 손수 향기 나는 목욕제를 챙겼고요. 현재 샤워기 개념인 벽면 물통을 이용해 몸에 물을 끼얹을 수도 있었죠. 물은 밖에 있던 하인이 넣었을 거로 추측합니다.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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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목욕이 본격 발달한 건 기원전 3세기 이탈리아 로마에서부터예요. 그리스인이 상대적으로 신체 단련 후 몸을 씻는 목욕을 즐긴 것과 달리 로마인은 목욕 그 자체를 즐겼죠. 기원전 140년경 ‘가진 자들의 낙원’으로 불린 폼페이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스타비아 목욕탕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된 로마식 목욕탕이에요. 스타비아 목욕탕에 온 손님들은 탈의실 개인 칸막이에 외출복을 보관했어요. 하인 혹은 목욕탕 관리인이 지켰고요. 탈의실 밖에 있는 풀밭 운동장에서 운동한 후 미온탕(Tepidarium·테피다리움)에 들어가 땀을 빼고 몸에 묻은 기름·먼지·땀을 긁개로 벗기는 식이었어요. 이후 마사지를 받고 쉬거나 온탕(Caldarium·칼다리움)으로 갔죠. 물에 들어가거나 물을 대야로 떠서 끼얹은 뒤 냉탕(Frigidarium·프리기다리움)으로 이동해 담소를 나누거나 쉬었습니다. 때론 여기서 마사지를 받기도 했고요. 훗날 들어선 이른바 ‘제국 목욕탕’에는 이상적인 순서가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입욕자 입맛대로 목욕 순서를 바꿀 수 있었어요.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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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목욕탕에는 온탕·냉탕·열탕이 필요했죠. 제국이 들어선 이후 로마에서는 공중목욕탕이 이른바 ‘황제의 성적표’로 불릴 정도로 중요하고 화려한 시설이었습니다. 민심을 얻기 위해 황제의 이름을 붙인 호화 공중목욕탕을 만들곤 했거든요. 로마 황제들은 대체로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거나 내란이 끝났을 때 시민에게 최고의 생활수준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호화 목욕탕을 만들었죠. 아우구스투스의 딸과 결혼한 아그리파가 기원전 25년 만든 ‘아그리파 목욕탕’은 현재 대중목욕탕의 시초로 해석되는데요. 인공 호수와 수로를 갖춘 넓은 정원 안에 있는 아그리파 목욕탕은 대략 가로 120m, 세로 100m 면적으로 최초의 ‘테르마이’죠. 테르마이는 목욕 말고도 다양한 기능을 하는 화려한 목욕 시설을 일컬어요.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찜질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목욕탕과 찜질방을 구분하듯 당시 수수한 목욕탕 ‘발네움’과 구분하기 위해 다른 명칭을 만든 거죠. 더 화려한 테르마이의 시작은 109년 트라야누스 목욕탕이에요. 트라야누스 목욕탕에는 가운데 목욕 구역을 중심으로 둘레에 집회실·도서관·강연장·체육관 등이 있었죠.

◇ 국내 곳곳의 목욕 역사를 모으다

울산광역시 문화원 연합회 박민수 사무처장(왼쪽)은 2018년 한 해 향토 연구원 7명과 ‘울산의 목욕문화 변천사’를 자세히 연구해 자료집을 내놨다. 정하민 학생기자가 박 처장 이야기를 듣고 있다.

울산광역시 문화원 연합회 박민수 사무처장(왼쪽)은 2018년 한 해 향토 연구원 7명과 ‘울산의 목욕문화 변천사’를 자세히 연구해 자료집을 내놨다. 정하민 학생기자가 박 처장 이야기를 듣고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죠. 울산광역시 문화원 연합회 박민수 처장은 이 말을 굳게 믿어요. 그는 2018년 향토 연구원 7명과 ‘울산의 목욕 문화 변천사’를 자세히 연구해 자료집을 내놨죠. 210쪽 분량에 국내 곳곳의 목욕 역사가 빼곡하게 적혔죠. “목욕탕도 말이나 글보다 사진 한 장이 후대가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 내부 촬영을 허락하는 업주가 없어 과거·현재 비교 사진을 확보하지 못해 아쉬웠죠.” 왜 목욕탕이 연구 대상이었을까요. “문화원에선 선조가 이어온 옛 문화와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일을 하죠. 우리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찾는 길을 주민과 함께하면서 발전해 나가야 하고요. 제가 지난 30년간 목욕하던 한양탕이 5년 전 없어졌어요. 지금 스물여덟 살인 아들이 다섯 살일 때부터 손잡고 가서 서로 등 밀고 바나나 우유, 요구르트 사 먹던 곳이죠. 새로 생긴 깨끗한 공중목욕탕도 있겠지만 옛 추억이란 게 있잖아요. 늦기 전에 목욕 문화를 연구해 후대에 전하자고 생각했죠.” 박 사무처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울산으로 달려온 정하민 학생기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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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집에서 주로 목욕해요. 욕조도 있지만 목욕할 때마다 사용하진 않아요.” 정 학생기자의 말에 박 사무처장이 입을 열었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예요. 강 근처죠. 1970년대까지 여름에는 강에 가서 목욕했죠. 마을에 규율이 있었어요. 저녁 9시까지는 여자분들이 목욕하는 거예요. 할머니 한 분이 기침 소리를 내시는데 그럼 남자들이 ‘아, 목욕 끝났나 보구나. 우리가 나갈 차례다’ 하는 거죠. 어린이와 어른의 목욕에도 차이가 있었어요. 어린이는 낮에 그냥 물에서 놀다가 몸 말리고 돌아오면 그게 목욕이었죠. 어른은 달라요. 비누를 조금 쓰는 거예요. 수건은 3~4명이 돌아가면서 썼죠. 예전엔 목욕용품을 구하기 쉽지 않았어요. 세탁용 비누로 씻기도 했으니까요.”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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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얘기를 듣던 정 학생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지역에는 등밀이 기계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 저도 많이 사용했어요. 혼자 목욕 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만든 거죠. 요샌 혼자 등을 닦을 수 있는 긴 도구가 있지만 예전에는 없었거든요. 1980년대 들어 둥근 판에 때를 밀 수 있는 천을 씌운 형태의 기계가 생기기 시작했죠. 전원을 켜고 등을 대면 둥근 판이 회전하고요.” 정 학생기자가 또 손을 들었어요. “탕 안에 물은 순환되는 건지 그냥 틀어두는 건지 알고 싶어요.” “물론 순환하죠. 저녁에 영업을 끝내면 탕의 물은 다 버리고 다음 날 아침 더운물을 채워요. 업장마다 다르지만 제가 조사한 울산 시내 목욕탕 기준이에요.” 2017년 생긴 공중위생관리법 ‘공중위생영업의 종류별 시설 및 설비기준’에 따르면 욕조수를 순환하여 여과하는 경우 자동 유입기에 의한 염소 소독장치 또는 오존장치를 설치해야 합니다. ‘공중위생영업자가 준수해야 하는 위생관리 기준(제7조 관련)’에 따르면 목욕실은 해충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월 1회 이상 소독해야 하고요. 탈의실·옷장·목욕실·발한실(사우나실 또는 한증막실)·물통·현관·화장실은 매일 1회 이상, 배수(配水)실·온수(溫水)조는 수시로 청소해야 하고요.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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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 년 자리 지켜 미래유산이 된 목욕탕

원삼탕 체험에 나선 노효은(왼쪽)·정 아인 학생기자가 미온탕·온탕 앞에 앉 아 보였다. 이들이 착용한 목욕 가운은 사진 촬영을 위한 소품일뿐 실제 공중 목욕탕에서 씻을 때 옷을 입고 들어가 선 안 된다.

원삼탕 체험에 나선 노효은(왼쪽)·정 아인 학생기자가 미온탕·온탕 앞에 앉 아 보였다. 이들이 착용한 목욕 가운은 사진 촬영을 위한 소품일뿐 실제 공중 목욕탕에서 씻을 때 옷을 입고 들어가 선 안 된다.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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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서울 시내 목욕장업 현황을 보면 1960년대에 만든 곳은 15개였죠. 1967년 9월 25일 신고·허가를 마친 원삼탕(용산구 원효로 123-12, 원효로 3가)은 2013년 2월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창업자 황옥곤씨가 ‘원효로 3가’ 위치에 맞춰 이름 지었고요. 노효은·정아인 학생기자가 각각 평소 사용하는 목욕용품을 들고 원삼탕을 체험하기로 했죠. 원삼탕은 매주 수요일에 쉬기 때문에 이날 찾았어요. 입구에는 ‘목욕합니다’가 적힌 안내판이 뒤집혀 걸려 있었죠. 영업하는 날엔 문에 바로 해서 걸어둡니다. “소년중앙에서 오셨구나!” 1987년 원삼탕을 인수한 진중길 사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인근 중앙청과시장은 용산전자상가로 바뀌었고 뜨내기 손님까지 와 발 디딜 틈 없던 탕은 단골들의 사랑방으로 바뀌었습니다. 학생기자단은 50여년간 원삼탕에서 일한 채종철 기관장을 만나기 위해 사장님과 2층으로 올라갔죠. 3층 건물인 원삼탕 1층은 여탕, 3층엔 사장실이 있어요. “군대를 제대한 후 원삼탕이 문 열 때부터 일했어요. 수십년간 주인도 몇 번 바뀌었죠. 옛날엔 근처에 중앙청과시장이 있어 사람이 바글바글했어요. 정말 많이 온 날은 남탕·여탕 합해 하루 1000여 명이 올 정도였죠. 사람이 하도 많으니 때도 못 밀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요.” 채 기관장에 이어 진 사장이 설명했습니다. “대개 하루에 손님 수백 분이 왔죠. 요즘엔 하루 50분 정도 오고요.”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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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면 두 면을 가득 채운 라커룸이 보여요. 한 면은 탕으로 들어가는 입구, 체중계, 손 씻는 곳이고요. 손 씻는 공용 세면대 옆에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눈에 띄었죠. 노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저건 양치용이에요?” 소금을 확인한 노 학생기자가 신기한 듯 또 한 가지 덧붙였어요. “여탕에선 볼 수 없는 게 있네요.” 나머지 한 면은 이발소입니다. “여기서 수십 년 일한 이발사가 직접 손님 머리를 다듬죠. 원삼탕만의 특색이랄까요.” 이발소에는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한 믹스커피, 나무 빗 등이 있습니다. 뭐가 또 특별하냐고요.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라커룸이 있는 면 끝에 있는 커다란 책장이죠. “여기엔 단골 물건이 있어요. 단골 분들은 매일 오전 4시에 문을 열면 다녀가거든요. 출근하기 전에 여기에서 씻고 나가는 거죠.” 촘촘하게 만든 칸에는 샴푸·비누·바디워시·린스·면도기와 이를 담을 목욕 가방 등 개별 물품이 있지만 문도 없고 열쇠도 없고 누구도 지키지 않죠. “누가 실수로 가져가거나 없어진 적은 없어요?” 정 학생기자의 질문에 기관장이 너털웃음을 지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우리는 수십 년 보아온 사람들이고 서로 예절을 지키기 때문에 뭐가 없어진 적은 없어요.” 정 학생기자는 생전 처음 보는 옛 목욕탕 광경이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만지고 체험했죠. 노 학생기자도 마찬가지예요. 두 친구는 체중계 옆 아령을 들고 힘을 뽐내거나 평상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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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어떻게 관리하세요?” 정 학생기자의 질문에 기관장이 답했어요. “매일 저녁 깨끗히 청소해요. 오전 4시에 문을 열어 오후 7시에 문을 닫는데, 그때부터 청소를 시작하죠. 물도 다 빼고 안을 닦죠. 매일 아침 새 물을 받고요.” 채 기관장은 목욕탕 인근에 거주합니다. 이 때문에 탕이 문전성시를 이뤘던 과거에는 손님들이 목욕탕 문 열라며 초인종을 누르는 해프닝도 있었죠. 노 학생기자도 궁금한 게 생겼어요. “물 온도는 어떻게 조절하세요?” “50년 일했으니 손만 넣어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렇게 온도를 맞추고 오랜 손님이 많으니 알아서 물 온도를 맞추기도 해요.” 두 학생기자가 감탄했어요.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건 경험치로 측정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는 거군요.”

4 원삼탕 목욕 구역 가운데는 바가지 탕이 있다. 5 원삼탕 남탕에 붙은 팻말. 빛바랜 팻 말이 오랜 세월을 보이는 듯하다. 6 노효은(왼쪽)·정아인 학생기자가 각 각 사용하는 목욕용품을 손에 들고 원 삼탕 앞에 섰다.

4 원삼탕 목욕 구역 가운데는 바가지 탕이 있다. 5 원삼탕 남탕에 붙은 팻말. 빛바랜 팻 말이 오랜 세월을 보이는 듯하다. 6 노효은(왼쪽)·정아인 학생기자가 각 각 사용하는 목욕용품을 손에 들고 원 삼탕 앞에 섰다.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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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 공간으로 들어가니 40평 남짓한 공간에 열탕·온탕·냉탕이 보여요. 3개 벽면은 샤워기로 가득하고 한쪽엔 한증막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네요. “여긴 따뜻한 편이에요! 앉으니 좋네요.” 수건으로 양머리를 하고 앉은 두 학생기자가 한증막 근처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 하네요. 그런데 이게 뭐죠. 한가운데에 길고 좁은 탕 하나가 있습니다. “저 이거 알아요! 바가지탕이에요.” 노 학생기자의 말에 정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바가지탕이 뭐야?” “목욕할 때 바가지로 물을 떠 몸에 끼얹는 곳이야.” 할머니 따라갔을 때 봤다며 반가워하던 노 학생기자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어요. “동네 목욕탕에서 바가지탕에 들어가는 분들이 있었어요. 황당했죠. 거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깨끗하게 받아둔 물을 떠서 몸에 뿌리는 용도로 만든 데잖아요. 하지만 어른들이라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좁은 바가지탕에 사람들이 들어가 있으면 당연히 그 물을 떠서 몸에 뿌릴 수도 없죠. 이런 경우 외에도 공중목욕탕은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야 할 예절이 있습니다. 주말에 목욕탕 갈 일이 있다면 목욕탕에서 지켜야 하는 예절을 알아보는 게 좋겠네요. 오랜 세월 위생과 사교의 장이던 목욕탕 문화를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말이죠.

“공중목욕탕에 가는 게 부끄럽다고요? 괜찮아요”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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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 비밀, 자기 존중 심리가 있어요.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자기의 소중한 몸. 어릴 때는 부모와 동일시하다가 이제는 경계선을 긋는 거예요. 선을 그어서 부모를 신뢰하지만 ‘나로서의 나’라는 독립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는 거예요. 수치심을 갖는 시기 즉 초자아가 발달한 시기가 되면 목욕탕을 가기 싫어할 수 있죠. 이는 성별 차이가 없어요. 시간이 흐르면 없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요. 자기를 열어 보이는 정도는 심리 상태와 성숙에 따라 개인마다 달라요.”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이향숙 소장

공중목욕탕에서 지켜야 하는 예절

(왼쪽부터)노효은 학생기자, 채종철 기관장, 정아인 학생기자.

(왼쪽부터)노효은 학생기자, 채종철 기관장, 정아인 학생기자.

소년중앙 커버스토리-목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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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탕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샤워합니다. 비누칠, 양치, 머리 감기 모두 끝내고 탕에 들어갑니다.
2) 머리카락이 길다면 묶습니다. 탕에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게 합니다.
3) 탕에서는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4) 대화할 때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5) 탕 안에서 수영하거나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6) 물을 끼얹을 때 옆 사람에게 튀기지 않도록 합니다.
7) 스마트폰·카메라 등 촬영할 수 있는 도구를 들고 가지 않습니다.

글=강민혜 기자 kang.minhye@joongang.co.kr, 사진=송상섭(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노효은(파주 와석초 6)·정아인(하남 위례초 6)·정하민(인천 용현남초 5) 학생기자, 참고 도서=『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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