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선 정장입으면 벌거벗은 임금님 느낌"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지난 18일 오후 경기 성남시 법무법인 세종 판교 분사무소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손에 든 스마트폰 뒷면엔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의 주인공 '우디'가 웃고 있었다. 잘못 들어오신거 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온 순간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조중일 변호사입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조중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스타트업 사무실 돌며 명함 뿌려 #실컷 키운 회사 뺏기는 창업주 많아 #계약서 꼼꼼히 보도록 법률 도움
세종은 지난해 6월 국내 대형 로펌 중 최초로 이곳에 분사무소를 열었다. 카카오, 엔씨소프트, 위메이드 등 IT(정보기술) 대기업에서부터 이제 막 창업한 스타트업까지 대부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위치다. 조중일(38ㆍ연수원36기) 변호사는 1년 전부터 서울 광화문 디타워에 있는 본사 대신 이곳에 상주하고 있다.
- 그렇게 입고 다니면 회사에서 뭐라고 하지 않나.
- “출근 첫날 원래 입던 대로 양복에 넥타이 매고 구두신고 나왔다.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오는데 뭔가 좀 민망했다. 다들 운동화 신고 캐주얼 차림으로 다니는데 나만 정장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느낌이었달까. 일주일 만에 양복을 옷장에 넣어두고 캐주얼로 바꿨다. 운동화 신고 출근한 건 변호사 생활 시작하고 처음이었다. 판교 기업 사람들이 나중에 얘기해주더라. ‘판교엔 종교단체 선교하시는 분과 외부 사람 외에는 양복입은 사람이 없다’고.”
- 베이징, 상하이, 호치민, 하노이에 이어 세종의 5번째 분사무소다. 왜 판교였나.
- “판교에는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이 될 만한 스타트업들이 많이 몰려 있다. 국내에 이렇게 많은 기업들이 한 지역에 밀집해 있는 곳이 드물다. 하지만 우리 본사는 서울 광화문에 있다. 스타트업을 만나고 싶어도 한번 왔다갔다 하는데 길에서만 2시간 반 이상 보내야 한다. 우리나 고객이나 너무 낭비라 생각했다. 그래서 분사무소를 차렸다.”
사무실 돌며 명함 뿌리니 '잡상인' 오해도
- 스타트업 고객이 많나.
- “처음엔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대형로펌이라는 인식 때문에 어렵게 생각하는거 같았다. 그래서 지난해 내내 스타트업들이 많이 있는 인근 스타트업 캠퍼스, 오피스텔을 직접 다니며 명함을 돌렸다. 일 없으면 동료인 김남훈 변호사(연수원 38기)랑 ‘야! 나가자’하고 오후 내내 사무실을 돌며 명함을 수십장씩 뿌렸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잡상인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 애먹었다. 정말 세종 변호사가 맞다고 몇차례씩 얘기해줘야 믿는 분도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업무의 약 70% 정도가 스타트업 관련한 건이다.”
걸어서 5분거리 사무실, 부르면 뛰어간다
- 업무 방식도 전통 로펌과 다를거 같다.
- “전화오면 찾아가는 ‘콜 택시’처럼 바로 찾아가는 ‘동네 변호사’를 지향한다. 어제도 전철 타고 출근하는데 판교역 바로 옆에 사무실이 있는 모 사장님한테 전화가 왔다. 들어보니 시간이 좀 걸릴거 같은 내용이라 ‘바로 갈게요’하고 전철에서 내려 사무실로 갔다. 미리 약속 잡고 미팅룸 잡고 하는 복잡한 절차 없이 바로 찾아가 현장에서 얼굴보며 얘기하는 일이 많다. 걸어서 거의 모든 지역 내 회사에 갈 수 있는 점이 판교의 장점이기도 하다.”
- 판교 분위기는 어떤가.
- “판교에 오기 전 창업 천국으로 불리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대형 로펌 GKH에서 일했었다. 그곳에서 본 창업 열기와 판교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있다. 새로운 혁신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에너지가 있다. 다만 이스라엘에선 거의 모든 스타트업이 시작 단계부터 미국, 유럽 등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반면 한국에선 내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스타트업이 아직까진 많다는 점은 차이다.”
계약서 무시하는 스타트업 많아
- 스타트업들이 많이 하는 법률적 실수는 뭐가 있나.
- “의외로 계약서를 잘 안보는 창업주들이 많다. 한 창업자가 3년간 공들여 회사를 키웠는데 한참 돈을 벌 시기에 회사를 빼앗긴 경우가 있었다. 외부 투자를 받는 단계에서 지분 구조가 본인 40%, 투자자 60%로 바뀌는데 그 위험성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계약서에 향후 몇년 간 비슷한 일을 못하게 하는 경업금지 조항까지 들어있어 낭패를 봤다. 계약서에 쓰여진 문구가 향후 어떤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지 최소한 알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 스타트업이 하기 쉬운 법률적 실수는 또 뭐가 있나.
-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고 사업 구조를 짜는 창업주도 있다. 남들이 전동킥보드 사업한다고 위험요소 검토 없이 킥보드만 빌려주는 사업을 하는 경우를 봤다. 현행법상 전동킥보드는 헬멧을 꼭 써야 한다. 만약 사고가 나면 빌려준 사람에게도 과실 요소가 될 수 있다. 단속을 안하니 사업을 할 수는 있을 텐데 뭐가 문제가 될지 사전에 검토는 해야 한다.”
-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대형 로펌은 비쌀거 같다는 인식이 있다.
- “통상 여러 분야 변호사들이 협업 형태로 처리하는 일반 대기업 사건과 달리 판교에선 파트너급 변호사가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는 시스템을 갖춰 비용을 낮췄다. 아주 복잡한 사건은 예외겠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효율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명이 처리한다. 또 스타트업은 창조경제혁신센터 법률지원서비스를 이용하면 건당 200만원씩 자문료를 지원받을 수도 있어 안내를 많이 하고 있다.”
판교=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