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다시보기
“친구의 아내인 나를 탐하려 모사를 꾸몄다. 죽어서라도 복수하겠다”
지난해 3월. 전북 무주 캠핑장에서 30대 부부가 나란히 숨을 거뒀습니다. 부부가 남긴 13장의 유서에는 한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된 건 남편의 30년지기 친구 박모(38)씨입니다. 박씨는 친구의 아내인 이모(당시 33세)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절망한 부부는 2심 재판이 열린 지 3일만에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1심 판결문에는 이씨를 두고 “불륜 사실이 발각될 것을 염려해 남편에게 허위로 강간 사실을 말했을 여지가 있다”고 의심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2심 역시 이씨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박씨의 무죄를 유지했습니다. 부부가 죽음으로 호소한 성폭행 피해는 왜 인정받지 못한 걸까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남편이 출장 간 틈을 타 친구가 접근해오다
사건의 발단이 된 건 2017년 4월 10일. 이날 이씨 남편은 해외로 출장을 갔습니다. 박씨는 갑자기 이씨에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하더니 “남편에게 다른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씨가 당황하자 친한 경찰에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어 “내가 지금 낫을 들고 있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되냐”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이씨에게 정신 차리라며 뺨과 머리를 때리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1ㆍ2심에서도 폭행으로 인정한 부분입니다. 이후부터 두 사람의 주장이 갈립니다. 이씨는 닷새 동안 박씨의 협박이 계속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만나달라는 데 응하지 않으면 남편과 딸들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겁을 주었다는 겁니다. 사건이 일어난 15일 새벽에도 박씨가 위협을 가하며 자신을 모텔까지 데려갔고, 거기서 성폭행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반면 박씨는 이씨와 닷새 사이에 연인관계로 발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첫날 충격적인 말을 들은 이씨가 “사실 남편과 이혼하려고 했었다”고 털어놓았고, 모텔에서도 이씨가 적극적으로 성관계에 임했다고 했습니다. 1ㆍ2심은 둘 중 박씨 말이 맞다고 손을 들어줬는데, 닷새 동안 나타난 이씨의 행적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성폭행 전후 5일 간의 기록들…어느 게 진실인가
판결문에 나타난 이씨의 행동은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성폭행 직전 닷새 동안 자신이 협박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텔에 들어가기 직전 남편에게 ‘졸려서 먼저 자겠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박씨는 이 기간 이씨와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들었다는 부부의 내밀한 가정사를 수사기관에 자세하게 진술했습니다.
모텔 앞 CCTV 영상도 피해자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재판부는 ”이씨가 모텔에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이 겁먹어 보이지 않고 강간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봤습니다. 박씨가 ‘템포’라는 여성용품 이름을 기억하고 있단 점도 근거로 들었습니다. 박씨는 모텔 안에서 이씨가 스스로 템포를 제거하고 왔다고 진술했는데, 보통의 남성들이 이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꾸며내기 어렵다고 본 겁니다. 남편이 귀국한 다음에도 이씨는 즉각 강간 피해를 알리지 않았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가해자인 박씨와 나눈 문자 메시지를 지웠습니다.
“폭력조직 소속 가해자…쉽게 남편에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이씨가 죄없는 사람을 신고한 걸까요. ‘상간녀의 거짓 무고’로 끝날 뻔했던 사건의 키를 바꾼 건 대법원입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원심이 박씨를 무죄로 판단한 건 잘못”이라며 사건을 2심 법정으로 되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사망한 이씨가 남편에게 닷새 간의 협박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박씨는 논산 지역의 폭력조직 소속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이씨가 해외에 가있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한들 일이 좋게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고려했습니다. 게다가 남편에게 이를 말하려면 ‘사생아’ 얘기부터 꺼내야 하는 부담이 따랐습니다. 박씨는 법정에서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고 인정했는데, 이씨가 섣불리 남편에게 말했다가 박씨 의도대로 오히려 부부 사이만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박씨가 부부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남편의 30년지기 친구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만나서 깊숙한 일상 얘기를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봤습니다. 모텔 앞 CCTV 영상에 대해선 “두 사람이 앞 뒤로 떨어져서 걸은 것일 뿐 다정한 모습도 아니었다”고 했고, 템포를 스스로 제거한 것도 일단 모텔에 들어간 상황에선 박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한 행동일 뿐이라 밝혔습니다.
이씨가 문제를 털어놓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도 짚었습니다. 남편이 귀국하자마자 장례식장으로 향해 저녁에서야 집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삭제된 문자는 박씨의 요구로 그가 보는 앞에서 지운 것이고, 이씨가 경찰 수사에서 메시지 복원에 적극 협조한 점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박씨는 이씨가 문자로 애정표현을 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증거를 제출하라는 재판부 요구에 ‘휴대전화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등의 핑계를 댔습니다. 또 그는 후배를 때린 일로도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재판 과정에서 CCTV 영상을 삭제하려고 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결국 대법원은 박씨에 대해 유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파기환송심은 강간 피해를 인정해 박씨에게 징역 4년 6월을 선고했고, 지난달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습니다. 3년 동안 5번의 재판이 이뤄진 끝에 이씨 부부의 호소가 받아들여진 겁니다.
증언 부정당하는 피해자들…“삶까지 부정당하는 고통”
대법원은 원심을 비롯해 판사들이 종종 저지르는 중대한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성폭행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대처 양상이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며,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술을 가볍게 배척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성인지 감수성’이라 부릅니다.
유족은 “1심 판결 이후 동네에 이씨가 꽃뱀이었다는 식의 소문이 나는 바람에 주변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토로했습니다. 이씨가 느꼈던 고통은 유서에서도 느껴집니다. 그는 ‘지난 1년간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있어도 살고 있어도, 웃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고 적었습니다.
신진희 변호사(법률구조공단 피해자 국선 전담)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증언이 부정당할 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심각한 모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목숨까지 걸면서 억울함을 증명해야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며 "피해자들에게 ‘성폭행의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등의 2차 가해성 발언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판다’는 ‘판결 다시 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