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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국제사회의 ‘무료급식소’가 된 베네수엘라…한국 지원금도 투입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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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경제난에 따른 생필품 부족으로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한 베네수엘라에 국제사회의 구호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4월 16일 인도주의적 구호 물품을 실은 적십자 트럭들이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처음 진입했다고 AP통신을 비롯한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베네수엘라 적십자사는 이날 첫 인도주의적 물자를 공급 받았으며 그중에는 정전 시 병원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발전기도 포함됐다고 밝혔다.

마우러 ICRC 총재, 마두로 대통령 만나 인도적 지원 물꼬 #ICRC 지원금 900만 달러를 2460만 달러로 증액해 활동 #한국 지원금 300만 달러 중 50만 달러 받아 위탁 집행 #가장 시급한 식수·위생과 의약품·의료기기 공급에 사용 #베네수엘라 보건복지부와 MOU…기초보건센터 지원 #마우러,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생명 구하러 나설 때” #현지는 병원조차 물·전기·약품·의료요원 부족한 상황 #국경지대는 무법천지…물자부족 속 무장 폭력 판쳐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국제 인도주의 기관의 구호가 처음 시작된 16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마크가 그려진 물통과 식수정화용 소독약품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국제 인도주의 기관의 구호가 처음 시작된 16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마크가 그려진 물통과 식수정화용 소독약품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식수통과 정화 약품, 발전기부터 배급  

AP통신에 따르면 이날 카라카스 시내에선 ICRC 등이 공급하고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요원들이 분배한 물통과 식수정화용 소독약품 등을 받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목격됐다. 베네수엘라는 잦은 정전으로 식수 공급조차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날 공급된 물량은 65만 명을 지원할 수 있는 분량이다. 적십자 기관의 이날 구호 물품 분배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국회의장인 후안 과이도 임시 대통령으로 분열된 베네수엘라 정치 세력 어디 곳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개별 국가도 곧 베네수엘라에 구호 활동을 펴기로 했다.

지난 16일 국제인도주의 기관의 구호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국제적십자사 적신월사 연맹 깃발과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마크를 달고 수도 카라카스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경제난으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해외 구호물자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위기가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16일 국제인도주의 기관의 구호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국제적십자사 적신월사 연맹 깃발과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마크를 달고 수도 카라카스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경제난으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해외 구호물자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위기가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신화=연합뉴스]

한국,300만 달러 지원…50만 달러 ICRC 집행

대한민국 정부도 베네수엘라에 3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고 이 가운데 100만 달러는 베네수엘라, 200만 달러는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콜롬비아·페루·에콰도르 등 주변 3개국에 지원하기로 했다고 지난 5일 밝혔다. ICRC는 한국 정부의 베네수엘라 지원금 중 50만 달러의 활용을 위탁받았다고 밝혔다.

마두로 대통령, 2월엔 “거지 아니다” 원조 거부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2월 해외 구호 식품·의약품 원조를 거부한 적이 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마두로는 미국과 캐나다 등이 이웃 콜롬비아에서 육로를 비상식량과 의약품 등 원조물자를 전달하려고 하자 지난 2월 6일 군대를 동원해 국경지대인 우레나와 콜롬비아 쿠쿠타 사이의 티엔디아스 다리를 대형 유조차와 컨테이너 운반 트럭 등으로 막아 통행을 차단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그날 “원조물자 전달은 미국의 군사 개입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2월 4일에는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라며 원조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과이도 국회의장은 지난 1월 23일 스스로 임시 대통령을 선언한 뒤 국제사회에 원조를 요청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9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피터 마우러 회장(왼쪽)을 만나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9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피터 마우러 회장(왼쪽)을 만나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마우러 ICRC 회장, 마두로 설득

이런 베네수엘라에 국제사회 원조의 봇물이 터진 것은 피터 마우러 ICRC 회장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AFP통신에 따르면 마우러 회장은 지난 4월 9일 카라카스에서 마두로 대통령을 만나 협력을 논의했다. 마우러 회장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마두로는 다음날인 10일 라디오 연설에서 ICRC와 자국에 대한 구호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 등 서방 국가가 아닌 국제기관이 주도한다는 점에 마두로에게 명분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지금까지 베네수엘라가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온 마두로는 국제기관의 원조물자 수용을 발표한 이 날 연설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피터 마우러 ICRC 회장이 베네수엘라 인도주의적 위기 현장을 찾아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ICRC]

피터 마우러 ICRC 회장이 베네수엘라 인도주의적 위기 현장을 찾아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ICRC]

ICRC 중립적·공정·독립적 활동으로 공신력  

ICRC는 정치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중립적이고 공정하며 독립적인 활동으로 전 세계에서 공신력을 얻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제적십자 운동을 이끌어왔다. 마우러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마두로 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소식통에 따르면 마우러 회장은 마두로 대통령은 물론 과이도 국회의장 측과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상의했으며, 이를 통해 국제기관의 구호를 순조롭게 끌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제1회 노벨평화상 앙리 뒤낭이 창설

ICRC는 1863년 스위스 사회사업가 앙리 뒤낭(1828~1910년)이 설립한 중립적인 민간국제기구로 분쟁이나 인도주의 위기를 겪는 지역의 포로·난민 보호 등이 핵심 업무다. 창시자 뒤낭은 1901년 제1회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ICRC는 지금까지 네 차례 노벨평화상을 단독 또는 공동으로 수상했다. 인간 존엄성 보호를 목표로 하는 국제적십자 운동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모체인 ICRC, 국내 재해구호와 보건복지 프로그램 등을 수행하는 각국의 적십자사·적신월사(이슬람권), 그리고 적십자 운동의 국제적 인도주의 활동과 원조를 지도·조정하는 국제적십자·적신월사 연맹(IFRC)이 그것이다.

지난 18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병원 앞에서 주민들이 물통과 정화용 소독약품으로 이뤄진 식수 키트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18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병원 앞에서 주민들이 물통과 정화용 소독약품으로 이뤄진 식수 키트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EPA=연합뉴스]

마우러 회장, 베네수엘라 위기 현장 보고

마우러 회장은 마두로 대통령을 만나 해외 원조 수용 의사를 끌어낸 것은 물론 엿새 동안 베네수엘라 곳곳을 돌며 인도주의적 위기 현장을 살펴봤다. ICRC가 이를 바탕으로 전한 상황 보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선 현재 병원에도 물과 전기, 의약품, 의료 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 콜롬비아 국경 지대는 무법천지로 아직도 수많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국경을 불법으로 넘고 있다. 현지 주민과 병원은 물자 부족 속에서 무장 폭력에도 시달리고 있다. 이주민과 구금자는 가족과 연락 두절돼 또 하나의 인도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에 따라 ICRC는 6000여 명의 이주민과 구금자에게 가족을 찾고 통화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직원들이 16일 국제인도주의 기관에서 공급 받은 식수 정화용 소독약품을 들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식량난은 물론 정전에 따른 식수난까지 겪고 있다. [EPA=연한뉴스]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직원들이 16일 국제인도주의 기관에서 공급 받은 식수 정화용 소독약품을 들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식량난은 물론 정전에 따른 식수난까지 겪고 있다. [EPA=연한뉴스]

ICRC, 베네수엘라 지원예산 2.7배 증액

이런 현장을 돌아본 마우러 회장은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라고 밝히고 ICRC의 베네수엘라 지원 예산 900만 달러를 2.7배인 2460만 달러로 증액했다. 이 예산은 물·위생·의료 공급 등 긴급 구호와 이주민·구금자 지원에 사용된다. ICRC는 베네수엘라 보건복지부와 MOU를 맺고 응급의료 관련 28개 병원과 8개 기초 보건센터에 교육 훈련과 식수 위생 및 의약품·의료기기 지원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 베네수엘라에선 전체 의사의 3분의 1인 2만 2000여 명이 위기 와중에 나라를 떠나 의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베네수엘라는 쿠바에 석유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의료 인력을 지원받기도 했다.

지난 14일 베네수엘라 주민들이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 이웃 나라인 콜롬비아로 들어서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선 경제 위기가 본격화한 지난 2015년 이후 인구의 10%인 300만 명이 콜롬비아 등 이웃국가로 이주했다. [AP=연합뉴스]

지난 14일 베네수엘라 주민들이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 이웃 나라인 콜롬비아로 들어서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선 경제 위기가 본격화한 지난 2015년 이후 인구의 10%인 300만 명이 콜롬비아 등 이웃국가로 이주했다. [AP=연합뉴스]

국민 8명 중 1명이 영양실조

사실 마두로 대통령의 주장과는 달리 베네수엘라 사태는 심각하다. 마두로가 인도주의적 위기가 아니라고 정말 믿는다면 국민 상황에 무지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알고도 그런 말을 했다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임을 드러낸 셈이다. AFP통신은 유엔아동기금(UNICEF)이 베네수엘라에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아동이 지난해 50만 명에서 올해 110만 명으로 네 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고 4일 보도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경제위기와 정국 혼란으로 이 나라를 떠났다가 귀국한 아동과 인근 가족을 따라 인근 중남미 국가로 이주한 난민 아동을 포함한 숫자다.
AFP통신이 지난 3월 28일 보도한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24%에 해당하는 약 700만 명은 긴급 원조와 보호가 절실하다. 이 가운데 약 370만 명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으며 5세 이하 아동의 22%는 만성 영양부족 상태다. 베네수엘라 국민 4명 중 1명은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며 8명 중 한 명은 영양실조라는 이야기다. 보고서는 수도 카라카스의 3개 대학이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2018년 현재 베네수엘라 국민의 94%가 빈곤 상태이고 60%는 ‘극빈’ 상태라고 밝혔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베네수엘라의 이주자와 구금자가 가족을 다시 찾고 서로 연결하는 사업을 벌이는 현장. [사진 ICRC]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베네수엘라의 이주자와 구금자가 가족을 다시 찾고 서로 연결하는 사업을 벌이는 현장. [사진 ICRC]

반정부·친정부 시위 속 300만 해외 탈출

베네수엘라는 2014년 이후 경제난 속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 식수난과 정전 사태에 시달리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 외에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면서 정국 혼란도 겪고 있다. 친정부와 반정부 시위가 번갈아 열리고 있다. 마두로는 지난해 5월 대선에서 68%의 지지율로 당선했지만, 야권은 주요 후보를 투옥하거나 가택 연금한 상황에서 치른 선거라는 이유로 무효를 주장한다.

“미국 경제제재 탓” 대 “부패와 실정 탓”

베네수엘라에선 지난 2015년 이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300만 명이 이웃 콜롬비아·페루·브라질 등으로 이주해 갈등을 빚어왔다. 경제난의 원인에 대해 마두로는 미국의 경제 제재를, 과이도는 마두로 정권의 부패와 실정을 각각 꼽고 있다. 세계 1위의 원유 매장량에도 경제 실정으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는 것도 모자라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베네수엘라는 전 세계가 조심해야 할 대표적인 ‘반면교사’ 사례로 자리 잡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이념도 자원도 아니고 합리적인 운용 능력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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