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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수도 없는데…경부고속도로 가치는 왜 12조원?

중앙일보

입력

경부고속도로 개통 [중앙포토]

경부고속도로 개통 [중앙포토]

한국에서 가장 비싼 국유재산은 경부고속도로다. 기획재정부가 2018 회계연도 국가 결산 보고서를 통해 밝힌 이 고속도로의 지난해 말 기준 가치는 12조1000억원이다. 이는 1년 전보다 1조원(9440억원)가량 가치가 올랐다. 가격이 매겨져 있다고 해서 12조1000억원을 내고 이 고속도로를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는 국가가 보유한 자산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측정한 회계장부상 수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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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재무제표에 자산으로 기록하려면, 화폐로 가치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고팔 수 있는 상장주식이나 부동산처럼 시장거래 가격이 있다면 이를 기준으로 하면 된다. 그러나 별다른 시장가격을 구하기 어려운 자산들은 취득원가로 기록하거나, 회계법인 등 별도 전문기관에 의뢰해 공정가치(시장가격)를 평가받아야 한다. 경부고속도로는 시장에서 사고팔 수 없는 자산이기 때문에 정부가 밝힌 이 도로의 가치 12조1000억원은 한국도로공사 등이 전문기관에 의뢰해 평가받은 수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변 땅값 올라 경부고속도로 가치 1년 새 1조 올라 

경부고속도로의 회계장부상 가치가 1년 새 1조원씩이나 오른 이유는 도로 주변 땅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서울·대전·대구·부산 등 핵심 대도시를 지나가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이 오른 땅값이 고속도로 가치에 반영된 것이다. 집값이 오르면 월세도 오를 수 있어 세입자들은 걱정이 늘게 된다. 하지만 고속도로 가치가 오른다고 일반 국민이 통행료가 오를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속도로 통행료는 도로 자산 가치와 무관하게 도로의 폭과 운행 거리, 화물의 무게 등에 따라 매겨진다.

경부고속도로 [중앙포토]

경부고속도로 [중앙포토]

한국의 도로 가치 측정 방식, 싱크홀 등 마모 상태 확인 못 해 

국민이 진짜로 걱정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한국 정부가 고속도로 가치를 측정하는 방식으로는 자산의 마모·훼손 등의 상태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가 회계는 전문적인 영역이지만, 이런 부분은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민 입장에선 땅값이 올라 고속도로의 재산 가치가 올랐다는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싱크홀 등 도로 파손이 심할 땐 가치가 떨어지고(유형자산 손상 차손), 예산을 들여 새것처럼 만들었을 땐(자본적 지출) 가치가 오르는 방식으로 자산의 상태를 회계 정보를 통해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도로의 상태와 무관한 정보라는 이유로 도로 주변 땅값을 자산 가치 측정에 반영하지 않는다.

통상 건물이나 선박 등 유형자산은 이용할 수 있는 수명(내용연수)에 따라 감가상각한다. 50년 동안 활용할 수 있는 건물의 가격이 50억원이라면, 매년 1억원씩 비용으로 털어내는 것이 감가상각법이다. 만약 이 건물의 가치가 20억원으로 기록돼 있다면, 재무제표 이용자들은 앞으로 20년 동안은 건물을 더 쓸 수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속도로는 이런 일반 건축물처럼 감가상각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도로는 일부 파손 구간을 복구하기만 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김선길 기재부 회계결산과장은 "도로 자산은 수명에 따라 감가상각하지 않는 대신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수선유지비 지출 내역을 도로 가치에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도로 상태, 상태 측정 기준 등 모두 공시 

전문가들은 그러나 도로의 구체적인 '현재 상태'가 어떤지,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선유지비 예산이 적정한 정도인지 등이 현재 한국의 국가 회계장부를 통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지방정부 회계기준에선 ▶사회기반시설의 상태 측정 기준▶현재 상태▶현재 상태와 측정 기준이 수선유지비 측정치에 미친 영향 등을 모두 공시하게 돼 있다.

국민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하루였다. 성수대교가 힘없이 내려앉은 이날 출근길 시민과 등교길 학생들의 생명을 앗아가버린 사고 현장의 강물에 떨어진 상판주위에서 구조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중앙일보 DB]

국민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하루였다. 성수대교가 힘없이 내려앉은 이날 출근길 시민과 등교길 학생들의 생명을 앗아가버린 사고 현장의 강물에 떨어진 상판주위에서 구조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중앙일보 DB]

"제2 성수대교 참사 막으려면, 정확한 SOC 상태 측정 공시해야"

정도진 한국회계정보학회 회장은 최근 논문에서 "사회기반시설의 사후관리 내역을 재무제표에 적절히 보고하지 않으면 정부는 이 시설의 취득에만 신경을 쓰게 되고, 취득 이후에는 적절한 예산을 투입해 유지·관리하지 않을 수 있다"며 "사회기반시설이 국민에게 제공하는 편익을 체계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정보 유용성 측면에서 적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1994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경험했다. 사회기반시설 마모 상태를 회계로 측정해 관리하면, 이런 사고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회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다른 국유재산도 정확한 상태와 적정한 수선유지 예산이 국민에게 보고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김도년의 썸타는 경제

액수ㆍ합계를 뜻하는 썸(SUM)에서 따온 ‘썸타는 경제’는 회계ㆍ통계 분석을 통해 한국 경제를 파헤칩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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