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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달려들었다...무슬림 의원 ‘9·11 테러 발언’으로 美정계 들썩

중앙일보

입력

“미국 혐오로 가득 찬 오마르의 배은망덕한 발언을 살펴보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저격해 날린 트윗입니다. 펠로시가 민주당 초선 의원인 일한 오마르(38)를 두둔하자, 그에게 “오마르 편에 서기 전에 그의 문제적 발언을 직시하라”고 충고를 한 겁니다.

[뉴스 따라잡기] #소말리아 난민 출신 무슬림 여성 의원 #“어떤 사람들이 무언가를 했다” 발언에 #공화당 “911 테러 심각성 축소했다” 맹공 #美 정계 들썩…양당 모두 정치 쟁점화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당선된 무슬림계 여성 의원 오마르의 한 마디가 미국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마르를 겨냥해 수차례 비난의 말을 퍼붓고 있지요. 민주당은 같은 당 의원을 감싸기도 내치기도 힘든 복잡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어떤 발언이기에 이토록 시끄러운 것일까요.

일한 오마르 민주당 하원의원. [AP=연합뉴스]

일한 오마르 민주당 하원의원. [AP=연합뉴스]

논란은 지난달 23일 한 무슬림 인권단체 행사에서 오마르가 9·11 테러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무언가를 했다(Some people did something)”고 말하며 시작됐습니다.

오마르는 이어 “이후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죠.  9·11 테러 이후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고, 이런 배경에서 무슬림 인권 운동이 활발히 시작됐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9·11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한 무슨 일’이라는 명확치 않은 표현을 쓴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미국 보수 진영은 즉시 무슬림인 오마르 의원이 9·11 테러의 의미와 심각성을 축소했다며 맹공격에 나섰습니다. 2799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를 ‘별것 아닌 듯한’ 뉘앙스로 표현했다는 거죠.

트럼프 대통령이 공격의 선두에 섰습니다. 지난 12일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오마르가 등장하는 43초 짜리 편집 동영상을 올리며 “우리는 (9·11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 동영상은 오마르 의원이 “어떤 사람들이 무언가를 했다”고 언급하는 장면과 9·11 테러 당시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장면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요. 오마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언급한 이 사건이 실은 엄청난 참사였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일한 오마르 하원의원의 911 테러 발언을 맹비난했다. [사진 트럼프 트위터]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일한 오마르 하원의원의 911 테러 발언을 맹비난했다. [사진 트럼프 트위터]

“소수자 혐오를 멈춰라”

오마르 의원은 소말리아 난민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 소말리아 내전을 피해 케냐의 난민 캠프에서 4년을 살았고 11살의 나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죠.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무슬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오마르에 대한 공격은 소수자에 대한 공격”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버니 샌더스 무소속 상원의원은 오마르에 비난을 쏟아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역겹고 위험한 공격을 멈추라”고 발언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도 “대통령이 현역 여성의원을 상대로 폭력을 선동하는 건 역겹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EPA=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EPA=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과 사사건건 부딪쳐온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지난 14일 성명을 냈습니다. “혐오적이고 선동적인 발언은 심각한 위험을 낳을 뿐”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트위터 게시물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죠.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오마르를 두둔하기 전에 오마르가 했던 반유대주의적, 반이스라엘적, 미국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찬 배은망덕한 발언들을 살펴보라”고 받아치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마르 의원의 지역구인 미네소타를 방문한 15일 방송 인터뷰에서도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동영상 업로드를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며 “오마르는 반애국적이며 우리나라에 극히 무례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죠. 트럼프의 이런 태도는 미국인들에게 극히 민감한 사안인 9·11을 이슈화해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민주당 딜레마…“지나친 친이슬람은 안 돼”

한편, 대외적으로는 오마르를 변호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실은 오마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뉴욕타임스(NYT)는 16일 “일한 오마르를 변호하는 일은 복잡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중도 성향의 민주당 의원들은 오마르 의원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마르의 좌파 성향이 스윙스테이트(Swing State·민주당과 공화당 중 한 쪽이 우세하지 않은 경합 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보도하며 민주당 의원들의 고민을 전했습니다.

NYT는 또 유력 대권 주자이자 유대인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역시 오마르에 대해 “뒤죽박죽인 반응”을 내놨다며, 샌더스가 폭스 인터뷰에서 “오마르 의원을 존중한다. 그가 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오마르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소통할 때 더 좋은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AP=연합뉴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과는 각을 세우면서도 지나치게 무슬림 편향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주당 의원들의 속내이자 딜레마라는 겁니다.

같은 민주당 소속인 커스틴 길리브랜드 상원의원 역시 “9·11 테러 희생자를 대변하는 뉴욕주 상원의원으로서 테러의 아픔을 축소 규정하는 어떤 행위도 용인할 수 없다”고 발언하며 오마르와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공세가 거세질 수록 오마르 의원에게는 호재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민주당내 ‘반(反)트럼프’의 상징으로 인지도가 상승하고 무슬림 유권자들이 결집한다는 겁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6일 오마르가 올 1분기 83만 2000달러(약 9억 4600만원)의 후원금을 모금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재직 의원 후원금 중간 값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하원 민주당 의원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죠. 전체 모금액 중 약 절반은 200달러 미만의 소액 기부였습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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