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서 스케이트보드 타고 벽에 똥칠···어산지 기이했던 7년

백발에 덥수룩한 수염, 남루한 풍모로 나타난 위키리크스 창업자 줄리안 어산지(47)의 체포 당시 모습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CNN의 국제선임기자 아티카 슈버트가 “내가 알고 있는 자신감 있고 대담하며 종종 계산적인 활동가가 아니었다”고 12일(현지시간) 썼을 정도다.

[뉴스 따라잡기] #‘기이 행동’ 속속 보도…실내서 스케이트보드 타고 속옷 방치하기도

바뀐 외모는 영국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의 만만치 않았던 망명생활을 짐작게 한다. 햇빛과 통풍이 없는 곳에서 마치 수감하듯 갇혀 있던 어산지, 그의 지난 7년은 대체 어땠던 걸까.

스페인 엘 파이스가 14일(현지시간) 공개한 망명 시절 줄리안 어산지(47)의 모습. 에콰도르 대사관 실내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 캡처]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호세 발렌시아 에콰도르 외무장관이 의회에 출석해 어산지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게 된 이유를 밝히며 초점을 둔 것 중 하나는 어산지의 무례한 처신이었다. 협소한 대사관 건물 안에서 축구를 하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탈 뿐 아니라 대사관 직원들을 홀대하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보안요원들과의 다툼도 있었다. 스페인 언론 엘 파이스가 입수해 14일 공개한 영상을 보면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어산지의 모습이 담겼다. 이 탓에 대사관 바닥이 망가지면서 직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위생문제도 논란이 됐다. 엘 파이스에 따르면 어산지는 음식물 찌꺼기가 있는 접시를 설거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쌓아 두는가 하면 속옷을 욕실에 방치했다. 대사관 측의 거듭된 경고도 무시했다고 한다. 화장실을 이용한 뒤 물을 내리지 않았고 간단한 조리시설만 갖춰진 작은 주방에서 요리해 대사관 직원들을 짜증나게 했다고도 매체는 전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일종의 ‘지저분한 시위(dirty protests)’를 했다고 표현했다. 마리아 파울라 로모 에콰도르 내무장관은 그가 대사관 벽에 대변을 칠하는 등 망명자로서 보여야 할 예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엘 파이스에 따르면 그는 상의만 입고 하의는 속옷 차림으로 TV 인터뷰에 응하는 기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줄리언 어산지(47)는 대사관 망명 생활 당시 지저분한 행위로 대사관 직원들을 짜증나게 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보도했다. [영국 데일리메일 캡처]

어산지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대사관에 들어가고 1년여 흐른 뒤 영국 텔레그래프와 스카이프로 90분간 진행한 원격 인터뷰에서 그는 “500일 동안 (아침에) 일어나 같은 벽을 보는 게 힘들다. 가족은 이사하고 이름을 바꿔야 했으며 우익 세력으로부터 협박을 당했다”고 말하면서도 비교적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적어도 이곳엔 경찰의 급습이 없고, 법치가 있다”고 말하면서다. 어산지는 대사관 직원들이 “가족 같다”며 “함께 점심을 먹고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국 뮤지션인 그레이엄 내시와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 미국 배우 피터 사스가드, 매기 질렌할, 존 쿠삭 등이 자신을 찾았다고도 밝혔다.

에콰도르 대사관 내 자신이 머무르던 방에서 줄리안 어산지(47)의 모습. [영국 데일리메일 캡처]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사무실을 개조해 마련된 9평(330평방피트) 남짓한 그의 거처엔 침대와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컴퓨터, 전화, 태양등 등이 갖춰져 있었다. 2012년 8월경 대사관에서 그를 만난 오랜 친구이자 지지자인 본 스미스는 로이터통신에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며 컴퓨터만 있으면 어산지가 잘 지낸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립 생활에 어산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갔다. 햇빛을 쐬지 못한 그는 비타민 D를 복용해야 했는데 망명 반년 정도 흐른 뒤인 2012년 11월 에콰도르 대사관 측은 그가 만성 폐 질환에 걸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종일 실내에서만 지낸 결과 햇빛 부족 등의 영향으로 폐 건강이 악화했다는 것이다. 2014년 “건강한 사람도 오래 머물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하소연하던 그는 2015년 답답한 생활로 “우울하고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2017년 10월 대사관에서 사흘간 머물며 어산지를 진찰한 보스턴 대학의 산드라 크로스비 부교수는 지난해 1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계속된 구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험하다. 건강관리라는 인간의 권리에 명백히 위배된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런던 내 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엘 파이스에 따르면 어산지는 발을 끌며 시력 문제를 호소했는데 이 때문에 의사는 먼 곳을 바라보라고 권고했고 대사관 측은 거리가 내다보이는 방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영국 경찰들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는 줄리안 어산지(47). [Ruptly 동영상 캡처]

7년 만의 체포는 그가 자초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에콰도르 측은 그를 수년간 보호하며 500만 파운드(약 74억원)를 썼다는데 어산지의 폭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밝히며 논란을 일으켰을 땐 대사관 측이 인터넷 선을 끊고 방문객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발렌시아 장관이 밝힌 어산지의 보호 철회 이유 9가지에도 이처럼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 사실이 포함됐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그러나 2017년 취임한 현 레닌 모레노 에콰도르 대통령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과 e메일 등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등 타격을 입힌 게 결정적이었다.

현재 미국과 스웨덴은 어산지를 넘겨받아 기밀누설과 성폭행 혐의를 각각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를 어디로 인도할지는 영국 정부가 결정한다. 영국 법원은 미국의 범죄인 송환 요청에 대해 5월 2일 심리할 예정이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