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4위 한진그룹의 조양호(사진) 회장이 별세했다. 70세.
폐 굳는 병 미국서 치료 받아 #국내 운구는 4~7일 걸릴 듯 #항공기 매각 뒤 재임차, 현금 확보 #45년간 항공·물류 선구적 역할 #재계 “해외 인맥·네트워크 아깝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이 8일 새벽(한국시간) 0시16분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이날 밝혔다.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빼앗긴 지 12일 만이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의 구체적인 사망 원인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조 회장은 지난해 11월부터 미국 현지에 머무르며 폐 질환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회장이 폐가 굳어지는 병이 있었는데 검찰 조사 이후 병세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달 정기 주주총회 이전까지는 업무보고도 받고 상태가 좋았는데 (사내 이사직 연임이 좌절된) 주주총회 이후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며 “이에 대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다”고 전했다. 조 회장은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오는 6월 귀국할 예정이었다.
조 회장의 부인 이명희(70) 전 일우재단 이사장, 장남 조원태(44) 대한항공 사장, 장녀 조현아(45) 전 대한항공 부사장, 차녀 조현민(36) 전 대한항공 전무 등 온 가족이 조 회장의 임종을 지킨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항공 측은 운구·장례 일정과 절차는 추후 결정되는 대로 공개할 계획이다.
조 회장의 운구는 미국 현지 사망확인서 발급과 항공편 확보 등으로 인해 최소 4일에서 7일가량이 걸린다.
외환위기 때 역발상 극복 … 글로벌 인맥 동원 평창 유치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조 회장은 1949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인하대 공과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이래 45년 이상 항공·운송사업 외길을 걸었다. 정비·자재·기획·정보통신·영업 등 항공 관련 전 부서를 두루 거치면서 실무까지 겸비했다. 그가 ‘항공산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 회장은 92년 대한항공 사장, 96년 한진그룹 부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을 맡으며 선친에 이어 그룹 경영을 주도했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극복 과정은 그의 경영 능력을 보여준다. 당시 대한항공이 운영하던 항공기 112대 중 임차기는 14대뿐이었다. 대부분 항공기를 자체 소유했다.
조 회장은 항공기를 매각 후 재임차하는 방식으로 현금을 확보해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었다. 조 회장은 20년 동안 한진그룹을 이끌며 재계 순위 14위, 자산 규모 30조 5000억원의 회사로 키웠다.
조 회장은 또 폭넓은 인맥과 해박한 실무지식으로 한국에서는 물론 글로벌 항공업계를 이끌었다. 그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스카이팀 창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2009년 겨울올림픽 3수에 돌입한 평창의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자신의 글로벌 인맥을 동원해 유치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조 회장의 인맥과 네트워크가 아깝다”며 “비운의 재벌”이란 평가가 나온다.
재계는 “큰 별이 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조양호 회장은 지난 45년간 변화와 혁신을 통해 황무지에 불과하던 항공·물류산업을 일으켜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며 조 회장의 공로를 평가했다.
정치권에선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 진영에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주의) 행사가 조 회장 사망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연금사회주의를 추구하던 문재인 정권의 첫 피해자가 오늘 영면했다”고 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당 대표까지 하신 분이 하고 있다”며 “고인까지 정쟁의 도구로 삼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곽재민·강기헌·문희철 기자 jmkwa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