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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타고 도로 위 20분 필사의 탈출, 산불 속 소외된 장애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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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속초시청] 이목리·신흥리 일대 주민들은 온정초교로, 교동삼환아파트 일대 주민들은 교동초교로 즉시 대피 바랍니다.”

밤 늦게 재난문자, 도우미는 퇴근 #수어방송 지체, 정보 파악 어려워

4일 밤 10시40분. 강원도 속초시 교동 주택에 홀로 사는 박지호(36)씨는 이런 문자를 받았다. 산불이 번지니 인근 초등학교로 대피하라며 속초시가 보낸 재난알림문자다. 뇌병변 1급 장애를 지닌 박씨는 혼자 거동하기 어렵다.

박씨는 “문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말했다. 박씨는 홀로 산다. 낮 동안 그를 돌봐주는 활동보조인은 저녁 6시쯤 퇴근했다. 박씨는 일단 1km 떨어진 친구 집으로 대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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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나서는 것부터 힘들었다. 박씨는 상체를 전혀 못 쓴다. 하체는 움직이긴 하지만 제대로 못 걷는다. 박씨는 반바지 차림으로 겨우 전동휠체어에 올랐다. 집 밖을 나서는 데만 15분이 걸렸다. 겨우 밖으로 나온 박씨 눈앞엔 차들이 빼곡한 도로가 보였다. 화재를 피해 피난가는 차량 행렬이었다. 그는 휠체어로 도로를 20분 넘게 달려 친구 집에 겨우 닿았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4일 밤 강원도 동해안에 발생한 화재 당시 박씨처럼 대피에 어려움을 겪은 장애인들이 상당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은 7일 성명을 내고 강원도 지역 장애인들이 산불이 발생하고 나서 대피 정보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씨처럼 휠체어를 이용해 움직이는 환자들은 밤 늦게 재난알림문자를 받으면 스스로 이에 대응하기 어렵다. 또 대피장소에 가도 어떤 지원을 받는지 알 방법도 없다. 결국 박씨처럼 친구집을 가거나 개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최명신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사무처장은 “정부의 재난 대응 매뉴얼에는 장애인 활동보조인을 파견하기 위한 긴급알림제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대피도 문제였지만 재난 정보를 얻기도 힘들었다. 김수연 한국농아인협회 기획부장은 “강원뿐 아니라 다른 지역 장애인들까지 왜 수어방송이 안 나오냐고 SNS 등 다양한 경로로 문의가 쏟아졌다”고 말했다. KBS·MBC·SBS 등 지상파 3사는 4일 오후 재난특보를 방송하면서 수어 통역을 지원하지 않았다. KBS와 SBS는 각각 5일 오전 8시, 오전 10시쯤 수어 통역 방송을 시작했다. MBC는 같은 날 11시30분에 가장 늦게 수어 통역을 시작했다. 한국농아인협회 김 부장은 “재난방송 시 방송사에 수어 통역을 요구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황이 마무리될 때쯤에나 통역사를 배치하는 등의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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