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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원 신부 "의대 자퇴후 수도자···서양도 스카이캐슬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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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다. 22일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산골에서 서명원(66) 신부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출신이다. 불어 이름은 베르나르 스네칼. 14년간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일하다 지난달 정년퇴직했다. 그리고 2015년 이곳에 세운 도전돌밭공동체로 내려왔다. 1000평 땅에 유기농 농사를 짓고, 컨테이너 건물로 세운 명상센터에서 영성을 일군다. 6명의 도반과 함께 수행과 학술 연구, 농사를 병행하고 있다. 젊었을 적, 그는 수도자의 길을 택하고자 의사의 길을 버렸다. ‘스카이 캐슬 왕국’에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 이유를 물었다.

서명원 신부는 "한국에서도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의 남편'으로 인정해주기 보다 여전히 '나의 아들'로만 보려고 한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집착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서명원 신부는 "한국에서도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의 남편'으로 인정해주기 보다 여전히 '나의 아들'로만 보려고 한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집착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의대를 5년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예수회원이 됐다. 왜 의대를 갔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간절히 원하셨다. 어머니는 극성스러운 ‘헬리콥터 맘’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올해로 8년째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를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다.”

서 신부의 외할아버지는 의사였다. 어머니는 의사의 딸이었고, 소아과 의사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다. 그리고 자식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랬다. ‘3대째 의사 집안’을 꾸리길 원했다.

최근 한국에서 ‘스카이 캐슬’이란 TV드라마가 큰 화제였다. 거기서도 ‘3대째 의사 집안’을 만들려는 ‘헬리콥터 맘’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는 아버지와 다르다. 아버지는 한 번 씨앗을 뿌리지만, 엄마는 그 씨앗을 내내 키우는 밭이다. 게다가 자신의 몸 안에서 생명체를 만들고, 10개월간 품고 있어야 한다. 그건 굉장히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경험이다. 아이들은 먹는 대로 똥 싸고, 마시는 대로 오줌을 싼다. 그들을 키우는 건 무척 귀찮고 고된 일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걸 한다. 모성애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애착은 강하다. 그런데 그 애착에는 사랑 뿐만 아니라 집착이 함께 있다.”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세운 명상센터의 창으로 서명원 신부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여주= 변선구 기자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세운 명상센터의 창으로 서명원 신부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여주= 변선구 기자

어머니는 왜 의대에 가길 원하셨나.
“그래야 일자리 걱정이 없으니까.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그래야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니까. 그래야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으니까. 출세하려면 미래가 밝은 전공 분야를 가져야 하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믿었다.”
마치 한국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서양 사람의 사고 방식은 좀 다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 유교 문화권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전세계적인 거라고 본다.”

서 신부는 5남매 중 셋째다. 딸 하나, 아들 넷인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딸은 변호사, 아들은 의사”라고 인생 계획을 모두 세워놓았다. “어머니는 의사 외에 다른 직업도 좋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의 인생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서 신부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 캐나다 퀘벡주의 몬트리올시에서 고등학교와 칼리지를 다녔다. 그리고 600년 전통인 프랑스 보르도대학의 의대에 입학했다. 경쟁률은 50대1이었다.

서명원 신부는 "TV에서 '스카이캐슬'을 보진 않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나의 스토리와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서명원 신부는 "TV에서 '스카이캐슬'을 보진 않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나의 스토리와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의대 공부는 어땠나.  
“의사가 되는 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소망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내게 강요하는 기성복 같은 인생 계획이었다. 나는 내게 알맞은 맞춤복을 원했다. 나는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철학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했다. 그런데 자꾸만 수학을 공부해야 했다. 물리학을 공부하고, 생물학을 공부해야 했다. 점수는 나왔지만, 억지로 하는 공부였다.”
왜 철학과 문학이 좋았나.
“궁금했다. 삶의 의미가 뭔지, 존재의 이유가 뭔지. 집 주위에 있던 너구리와 고라니, 그리고 들풀들도 결국 죽는 존재였다.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이 삶의 의미는 뭘까.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고 떠들 때는 즐거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늘 그 너머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프랑스 대학의 입학은 수월한 편이다. 그러나 졸업은 무척 어렵다. 의대는 예과 1학년 시험을 마치면 학생들의 상당수가 잘려나간다. 1학년 시험에서 한 차례 낙방한 그는 목숨을 걸고 공부했다. 결국 예과 1학년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5년간 보르도 의대를 다녔다.
방학 때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몬트리올시에 있는 성모병원의 지하 해부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 달 반인 여름방학 내내 시신을 해부했다. 그 일로 학비와 생활비의 50%를 벌었다. 나머지 50%는 부모님이 댔다. 그는 5년간 여름방학 아르바이트에서 무려 359구의 시신을 해부했다.

프랑스 보르도 의과대학 재학 시절 럭비팀에서 활동했던 서명원 신부가 앞줄 맨 오른쪽에 앉아 있다. [사진 서명원 신부]

프랑스 보르도 의과대학 재학 시절 럭비팀에서 활동했던 서명원 신부가 앞줄 맨 오른쪽에 앉아 있다. [사진 서명원 신부]

여주 강천면 도전돌밭공동체의 텃밭에서 일을 하다가 서명원 신부가 공동체 회원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여주=변선구 기자

여주 강천면 도전돌밭공동체의 텃밭에서 일을 하다가 서명원 신부가 공동체 회원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여주=변선구 기자

시신 해부는 힘들지 않았나.
“첫 해부 때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내장에서 나오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그래도 참았다. 그게 입문인데, 거기서 멈추면 더 못 들어 가니까. 시신을 해부할 때는 목부터 배꼽까지 절개해서 다 연다. 오장육부를 잘라서 조직 검사를 한다. 머리도 잘라서 뇌를 꺼내 육안으로 다 봤다. 뇌출혈이 있었다면 해당 부위가 단단하지 않고 물렁물렁 해지니까. 그런 걸 손으로 다 만지며 찾아냈다. 정말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다.”
가장 크게 배운 건 뭔가.  
“시신들 중에는 꼬마들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도 있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죽음’을 생각했다. 해부실 아르바이트는 나로 하여금 죽음을 직시하게 했다. ‘오늘 병원 휴게실에서 만난 아이도 머지않아 나처럼 나이가 들 거고, 나중에는 노인이 되어서, 결국에는 죽겠지. 누구도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겠지.’ 나는 그걸 배웠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 일했으니까 가능했다.”  
부산 항구에서 가져온 컨테이너로 명상센터 건물을 만들었다. 내부에도 난방과 조명시설을 갖추어 아늑한 느낌이다. 여주=변선구 기자

부산 항구에서 가져온 컨테이너로 명상센터 건물을 만들었다. 내부에도 난방과 조명시설을 갖추어 아늑한 느낌이다. 여주=변선구 기자

명상센터에 만든 조그만 경당. 이곳에서 도반들과 명상과 기도를 한다. 안에는 명상을 위한 죽비와 방석 등이 놓여 있었다. 여주=변선구 기자

명상센터에 만든 조그만 경당. 이곳에서 도반들과 명상과 기도를 한다. 안에는 명상을 위한 죽비와 방석 등이 놓여 있었다. 여주=변선구 기자

서 신부는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루이스 랭카스터 UC버클리대 명예교수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랭카스터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인생에는 세 명의 천사가 내려온다. 첫 번째는 늙음, 두 번째는 병듦, 세 번째는 죽음이다. 이 셋을 만나지 않고서는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없다.’ 당시 랭카스터 교수님은 80세였다. 나는 그분의 말씀에 공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늙은이는 내가 아니다, 병자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해부실에서 ‘세 번째 천사’를 미리 만난 셈이다. 당신의 삶, 무엇이 달라졌나.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물음들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건 내 인생의 숙제였다. 나는 중ㆍ고등학교 8년간 예수회 학교를 다녔다. 1979년 4월, 의대 5년차였다. 나는 보르도에서 기차를 타고 8시간 떨어진 리옹으로 갔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지역의 수도원으로 가서 8일간 피정을 했다. 명상을 할수록 내 마음의 소리가 뚜렷해졌다. 6일, 7일, 8일째 되던 날, 나는 갈수록 더 깊이 느꼈다. ‘독신 생활, 수도 생활을 해야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걸 확실히 느꼈다.”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셨나.
“말도 못할 정도였다. ‘거짓말쟁이’‘위선자’‘배신자’‘인생의 낙오자’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그동안 투자한 돈을 다 날려버렸다’는 말까지 들었다. 부모님은 엄청나게 반발하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돌아보니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아니라 ‘부모님이 바라는 나’가 돼 있었다. 그 둘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 지점에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택했다. 그래서 여름에 의대를 자퇴하고, 가을에 프랑스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980년 3월에 만든 서명원 신부의 여권 사진. 프랑스 예수회에 입회한 지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때다.[사진 서명원 신부]

1980년 3월에 만든 서명원 신부의 여권 사진. 프랑스 예수회에 입회한 지 불과 몇 달이 지났을 때다.[사진 서명원 신부]

서명원 신부는 "프랑스 예수회 수도회에 입회할 때 7개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프랑스인이 아닌 캐나다 사람이 프랑스 수도회에 입회하는데다, 의대를 다니던 신분이라 더 엄격한 심사를 치렀던 것 같다. 결국 부모님에게서는 추천서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서명원 신부는 "프랑스 예수회 수도회에 입회할 때 7개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프랑스인이 아닌 캐나다 사람이 프랑스 수도회에 입회하는데다, 의대를 다니던 신분이라 더 엄격한 심사를 치렀던 것 같다. 결국 부모님에게서는 추천서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만약 그때 ‘부모님이 바라는 나’를 택했다면.  
“불행해졌을 거다. 제 남동생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 모든 과목에서 1등이었다. 캐나다의 명문 의대에 합격했다. 어머니가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동생은 합격 점수를 확인한 날 저녁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엄마,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의과대학에 합격해 드렸어요. 이제 됐죠?’ 이거였다. 그때까지 동생은 단 한 번도 ‘의대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다른 남동생도 의사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50세 때 의사 생활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의사로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불행한 인생이었다. 의사가 됐다면 나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막상 수도원에 들어가니까 어땠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심어졌다는 느낌이었다. 그걸 늘 느꼈다. 지금껏 살면서 수도자의 길이 힘들 때도 많았다. 산전수전을 수시로 겪었다.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길이 맞을까’하는 의심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의대에 다닐 때는 반대였다. 늘 그런 의심 속에서 살았다.”
각자의 삶에서 ‘내면의 소리’를 찾아가는 게 왜 중요한가.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나는 나의 일생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했다.’ 무슨 뜻일까.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갈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살게 된다. 나는 매순간 본질적으로 살고 싶었다. ‘죽을 때 여한이 없으려면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물음을 던져보라. 답이 어디에 있을까. 자기 가슴에서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에 그 답이 있다고 본다.”    
서명원 신부는 "나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를 만나면서 나는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가 됐다. 이제는 세계 종교라는 큰 바다에서 헤엄을 쳐도 익사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개구리가 됐다. 나의 종교관은 엄청나게 성숙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를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사진 서명원 신부]

서명원 신부는 "나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를 만나면서 나는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가 됐다. 이제는 세계 종교라는 큰 바다에서 헤엄을 쳐도 익사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개구리가 됐다. 나의 종교관은 엄청나게 성숙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를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사진 서명원 신부]

서명원 신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명이 필요하다. 삶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흙을 만지는 건 그 첫발을 딛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서명원 신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명이 필요하다. 삶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흙을 만지는 건 그 첫발을 딛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주=변선구 기자

여주=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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