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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밸리 정보 오가던 치맥문화, 판교선 안 보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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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낮엔 13만명, 밤엔 2만명…밤엔 텅비는 판교

밤이면 텅 비는 판교밸리. 성남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주간 13만 명에 달하는 판교의 유동 인구는 야간에는 2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다. 김정민 기자

밤이면 텅 비는 판교밸리. 성남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주간 13만 명에 달하는 판교의 유동 인구는 야간에는 2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다. 김정민 기자

 밤이면 텅 비는 판교밸리. 성남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주간 13만 명에 달하는 유동인구는 야간에는 2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다. 김정민 기자

밤이면 텅 비는 판교밸리. 성남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주간 13만 명에 달하는 유동인구는 야간에는 2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다. 김정민 기자

판교의 밤은 외롭다.
낮에는 13만 명의 유동인구가 몰리지만, 밤에는 2만 명으로 뚝 떨어진다(성남상공회의소). 오후 8시 넘어서까지 가게 문을 연 곳은 드물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판교밸리의 중심 상권인 H스퀘어 주변은 밤이 되면 적막감이 감돈다. 지난 29일 저녁에도 그랬다. 야외 파라솔은 모두 접혀 있고, 의자들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카카오 직원인 김요한(37)씨는 “판교밸리가 처음 조성됐을 때부터 교통 문제 등으로 늦게까지 서로 어울리는 문화가 없었다”며 옆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가리켰다. 판교 상인연합회가 걸어둔 현수막엔 ‘건물주와 임차인은 가족입니다. 도와주세요. 함께 사는 가족이 춥고 어렵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판교 상인들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는 문구다.

낮 13만 → 밤엔 2만명 공동화 #근처에 R&D 연계할 대학 없고 #창업자 경험 공유할 기회도 부족

일과 시간 이후엔 인적이 드물다보니, 이 일대 기업 재직자 간 활발한 교류도 부족하다. 판교 직장인 윤승재(37)씨는 “퇴근 후 판교에서 사적인 만남은 거의 없다”며 “회식은 조금 있지만 그나마 회식도 주52시간제로 많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퇴근 후 아이디어 나누는 문화가 없다

한국의 신(新)성장 동력으로 각광받는 판교밸리다. 하지만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일과 후엔 도시가 텅 비는 '야간 공동화' 문제가 대표적이다. 과거 강남 테헤란밸리의 개발자들이 낮에는 회사에서, 밤에는 치킨 집 등에서 아이디어를 나누며 시너지를 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상호 작용이 부족한 탓인지 테헤란 밸리 시절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실제 넥슨의 창업 초기를 다룬 책 『플레이』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넥슨이 세들어 있던 선릉역 근처 세강빌딩 바로 옆엔 치킨집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앞엔 작은 수퍼마켓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선 라면도 끓여줬다. 치킨집과 수퍼마켓이 사실상 넥슨 개발팀의 공동 회의 장소가 됐다. (중략) 야근을 하다가 치킨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회사 안에선 각자 개발을 하느라 바빴다. 치킨 집에서 진짜 정보가 오고 갔다.”

2010년 미국 애플의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구글의 에릭 슈미트 당시 최고경영자(CEO)와 차를 마시며 애플의 iOS 운영체제와 닮은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에 대해 항의하던 장소 역시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카페였다.

2010년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구글의 에릭 슈미트 당시 CEO를 실리콘밸리 내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기즈모도

2010년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구글의 에릭 슈미트 당시 CEO를 실리콘밸리 내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기즈모도

대학 하나 없는 디지털밸리, 판교

판교밸리에는 대학이나 연구&개발(R&D) 기반도 턱없이 부족하다. 스탠퍼드 대학이나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UC Berkeley)처럼 탄탄한 R&D '뒷 배경'을  갖춘 실리콘밸리와는 정 반대다. 사실 실리콘밸리는 1930년대 후반부터 스탠퍼드대 프레드릭 터먼 교수를 비롯한 민간의 주도로 자연스레 형성됐다. 관(官) 주도로 ‘조성’된 판교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판교의 한계다. 개발자들이 퇴근 후 대전이나 서울을 오가는 이유다.

포스코ICT의 김수상 차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김 차장은 AI(인공지능)기술 사업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올 초 대전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술경영전공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일주일에 2번씩 대전과 판교를 오간다. 한 번 갈 때마다 통학에만 왕복 4시간이 걸린다. 김 차장은 “새로운 지식을 쌓을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체력적으로 피곤한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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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주의'에 빠진 1세대 창업자들

주요 IT기업을 일군 1세대 창업자들의 지나친 '비밀주의' 행보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정주(51) NXC 대표나 이해진(52)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직원들도 보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들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배울 기회가 줄어든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판교 소재 IT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겉으론 ‘사회와 호흡한다’는 창업자들이 자기들끼리 배타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구중궁궐에 사는 식이니 어떻게 사회와 호흡한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이는 미국 실리콘밸리 창업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한 예로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은 ‘실리콘밸리 리더십 그룹(Silicon Valley Leadership Group)’을 만들어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현안에 대한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리더십그룹은 1978년 HP 창업자인 데이비드 패커드 주도로 만들어졌다. 현재 HP를 비롯해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 등 330여 개 기업의 창업자나 최고 경영자가 참여하고 있다.

대표 IT기업 9곳 중 6곳이 실적 악화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단 소속 기업 실적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단 소속 기업 실적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해서일까. 기대만큼의 혁신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국인터넷기업협회에 속한 주요 IT기업들의 실적도 최근 들어 뒷걸음질 치고 있다. 협회에는 네이버와 카카오를 비롯한 192개 IT기업이 속해 있다. 현재 협회 회장은 네이버 한성숙(52) 대표가, 수석부회장은 카카오 여민수(50) 대표가 각각 맡고 있다.

29일 중앙일보가 네이버와 카카오, 넥슨, 엔씨소프트 등 9개 회장단 기업(이베이코리아와 페이스북 코리아는 실적 공개 전)의 지난해 실적을 분석한 결과, 전년보다 당기순이익이 줄어든 기업은 6곳이나 됐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IT기업의 3분의 2가 실적이 악화한 것이다. 카카오의 당기순이익은 2017년 1250억원에서 지난해 159억원으로 87.3%가 줄었고, 2017년 1조73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던 넥슨은 지난해 5553억원(48.3% 감소)의 이익을 내는 데 그쳤다.

회장사인 네이버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6279억원으로 전년보다 18.5%가 줄었다. 11번가와 SK커뮤니케이션즈는 전년보다 성적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각각 678억원, 103억원의 손실을 봤다. 9개 기업 중 흑자이면서, 당기순이익이 늘어난 기업은 KG이니시스(407억원) 한 곳에 그쳤다. 정광호 서울대 교수(개방형혁신학회 부회장)는 “판교 같은 혁신 생태계의 핵심은 인재와 자금인데, 인재의 산실이라는 판교에 정작 대학은 없다”고 꼬집었다. 정 교수는 “수도권의 신규 대학 설립을 막는 규제를 풀고, 1세대 창업자들 역시 본인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더 적극적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판교=이수기ㆍ김정민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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