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수입 맥주캔에 시커먼 매직펜 덧칠, 왜 하는 걸까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13)

지난 3월 중순 서울 을지로의 한 수입 맥주 전문 펍에는 라벨이 검은색으로 뒤덮인 수입 맥주 캔이 등장했다. 전 세계 맥주 양조장들이 라벨에 맥주의 아이덴티티를 담으면서 소비자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치열한 디자인 경쟁을 벌이는 추세를 고려해 볼 때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단순한 검은색 라벨로 맥주와 양조장의 특색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라벨의 한쪽 구석에는 그림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특정 부분에만 거칠게 검은색이 덧입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토스티드 메이플 스타우트 라벨. [사진 Lervig 홈페이지]

토스티드 메이플 스타우트 라벨. [사진 Lervig 홈페이지]

이 맥주는 노르웨이 러비그(Lervig) 브루어리의 ‘토스티드 메이플 스타우트’라는 제품이다. 세관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 맥주의 라벨에는 회색 바탕에 인물의 전신이 표현돼 있었다. 그러나 통관 과정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비키니를 입은 여성의 모습이 사회 윤리에 반한다고 판단해 시정 명령을 내렸다.

토스티드 메이플 스타우트 맥주 라벨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워낙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여기에 이 형상이 여성이며, 비키니를 착용했다는 것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추정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약처의 조치에 따라야 맥주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기 때문에 수입사 측은 캔 라벨 하나하나를 검은 매직펜으로 덧칠하는 수작업을 진행했다.

라벨 재작업을 한 '토스티드 메이플 스타우트' 캔. [사진 서울비어프로젝트 페이스북]

라벨 재작업을 한 '토스티드 메이플 스타우트' 캔. [사진 서울비어프로젝트 페이스북]

또 같은 양조장에서 만든 ‘메디슨(Medicine)’이라는 맥주는 이름이 약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이유로 수입에 제동이 걸려 ‘Medixxxx’ 맥주로 출시됐다. ‘리퀴드 섹스 머신’이라는 맥주도 ‘리퀴드 머신’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래핑 스컬’이라는 맥주가 미국에서 처음 수입될 때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해골 모양이 트레이드마크인 이 맥주는 해골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통관이 보류됐다. 수입사 측에서는 국내에 있는 해골, 악마, 사탄 등이 그려있는 여러 라벨의 주류 제품을 제시하며 식약처를 설득해 겨우 국내 시장에 들여올 수 있었다.

래핑 스컬 맥주. [사진 래핑스컬 홈페이지]

래핑 스컬 맥주. [사진 래핑스컬 홈페이지]

벨기에의 칸티용 양조장에서 수입해온 맥주 중 하나는 여성의 상반신이 노출돼 있다는 이유로 통관이 안 돼 수입사에서 따로 라벨 작업을 하는가 하면 ‘비키니’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맥주 이름에 들어있다는 이유로 통관이 지연된 사례도 있다.

이처럼 라벨 그림이나 제품명 때문에 통관이 지연되거나 불허될 경우 대부분 소규모인 수입사들은 막대한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세관에 제품이 묶여 있으면서 창고이용료 등의 부담을 안게 되고 아예 통관이 안 된다면 제품을 해외 제조사로 반품하거나 폐기에 따른 금전적 피해를 보게 된다.

여러 단계를 거쳐 수입된다고 하더라도 신선도 유지가 생명인 수제 맥주의 제품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류비, 창고료, 라벨 재작업비 등이 결국에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것은 물론이다.

맥주 업계 관계자는 “식약처가 명확한 규정도 없이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며 “시대에 맞지 않는 잣대를 들이대 결국 소기업과 소비자가 손해를 떠안는 형국”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수도원 맥주, 노란색 라벨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벨기에 맥주. 구운 맥아로 만들어 향이 풍부하며 쌉쌀한 맛이 일품인 짙은 갈색의 맥주. [중앙포토]

수도원 맥주, 노란색 라벨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벨기에 맥주. 구운 맥아로 만들어 향이 풍부하며 쌉쌀한 맛이 일품인 짙은 갈색의 맥주. [중앙포토]

주류명이나 라벨의 그림 등과 관련해 시장에 내놓을지는 관할 식약처 지방청이 결정한다. 근거는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률의 제8조 8항 ‘사행심을 조장하거나 음란한 표현을 사용하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현저하게 침해하는 표시 또는 광고’ 금지 조항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이 조항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는 그림이나 이름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를 ‘현저히’ 침해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도 백이면 백 사람의 생각이 다를 것이다. 식약처 담당자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맥주의 제품명이나 라벨 그림에 대한 규제 목적은 ‘소비자 보호’다. 현재 실행되고 있는 규제가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규제의 근거 명확화와 시대에 맞는 개선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황지혜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