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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주주권 행사…기업오너 첫 경영 퇴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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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대한항공 주주들은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빌딩에서 열린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을 부결시켰다. [연합뉴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대한항공 주주들은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빌딩에서 열린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을 부결시켰다. [연합뉴스]

639조원 기금을 앞세운 국민연금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저지했다. 조 회장은 1999년 4월 아버지 고(故)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 원칙) 행사를 강조한 이후 주주가 대기업 사주의 경영권을 박탈한 첫 사례다.
찬성 64.1%, 반대 35.9%.
27일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나온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에 대한 찬반 결과다. 조 회장은 주주총회 참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사내이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분 2.6%가 부족했다.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 연대 지부장이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제57기 정기주주총회를 마친 뒤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이날 주총에서 대한항공의 이사로 재직 중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이사연임안건이 부결됐다. 2019.3.27 최승식 기자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 연대 지부장이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제57기 정기주주총회를 마친 뒤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이날 주총에서 대한항공의 이사로 재직 중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이사연임안건이 부결됐다. 2019.3.27 최승식 기자

연임안 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56%를 보유한 2대 주주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주주총회 하루 전날인 26일 조 회장의 사내이사직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펼친 대한항공은 '2대주주 국민연금'의 결정에 속수무책이었다.

27일 서울 강서구 발산1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연임이 저지된 가운데 본사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최승식 기자

27일 서울 강서구 발산1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연임이 저지된 가운데 본사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최승식 기자

재계는 일제히 유감을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주주총회가 끝난 지 50분 만에 입장문을 내고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하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평가는 부분적, 일시적 사정을 넘어 장기간의 경영성과와 총체적인 관리능력 등에 대해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지만 국민연금이 조 회장 건을 심의한 과정을 보면 심도 있는 논의 없이 여론에 휩쓸려 결정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 판단은 달랐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최 위원장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 부결이 국민연금만의 의사 결정이 아닌 자산운용사・의결권자문사 등이 권하고 한 것 아니냐(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질의에 “타당한 지적”이라고 답했다.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 연대 지부장이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제57기 정기주주총회를 마친 뒤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이날 주총에서 대한항공의 이사로 재직 중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이사연임안건이 부결됐다. 2019.3.27 최승식 기자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 연대 지부장이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제57기 정기주주총회를 마친 뒤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이날 주총에서 대한항공의 이사로 재직 중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이사연임안건이 부결됐다. 2019.3.27 최승식 기자

재계에선 조 회장의 사내이사직 연임 부결을 놓고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와 동시에 각 기업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반대 입장에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지난 22일 열린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와 효성의 주주총회가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은 이날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의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선임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반면 국민연금은 같은 날 열린 효성 주주총회에선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 등을 사외이사로 재선임하는 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대한항공은 사회적 물의가 반대 이유인데 수많은 사회적 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경우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발동해 견제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아직 없다”고 말했다.

조양호 사내이사 연임안 부결 #20년 만에 대표이사직 물러나 #대한항공·한진칼 주가는 올라 #재계선 “연금사회주의 우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외에선 스튜어드십 코드를 자율규범으로 여기고 있어 정부가 나서 코드 발동을 강제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27일 서울 강서구 발산1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한 박창진 사무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양호 회장의 연임 저지에 성공한 뒤 밝은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승식 기자

27일 서울 강서구 발산1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한 박창진 사무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양호 회장의 연임 저지에 성공한 뒤 밝은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승식 기자

재계에선 대한한공 사례를 스튜어드십 코드가 본격화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문가는 이에 따른 시장 혼란을 줄이기 위해선 국민연금기금 운영에 있어 정부 입김을 배제하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 기금 운영에 있어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자산 규모 기준 세계 5대 국가(한국・일본・캐나다・미국・네덜란드) 연기금의 운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기금운용 이사회가 정부 소속인 경우는 한국이 유일했다.

조 회장이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있다. 29일 열리는 한진칼 주총이다. 한진칼은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회사다. 쟁점은 국민연금이 주주제안으로 올린 정관변경 안건이다. 국민연금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금고 이상 형이 확정된 이사는 결원 처리한다’는 정관변경 안을 냈다. 국민연금은 한진칼 지분 6.7%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2대 주주인 강성부펀드(지분율 12.01%)가 최대주주인 조 회장 측(28.95%)에 도전장을 낸 상황이어서 치열한 표 대결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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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대한항공 주식은 전날보다 800원 오른 3만3200원, 한진칼은 전날보다 100원 오른 2만5700원이었다. 박광래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조 회장 연임 실패가 한진그룹 체질 개선이 시작될 수 있다는 신호로 시장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강기헌・윤상언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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