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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는 전문가가 이끄는데 한국은 장관...'정부입김' 취약한 639조 국민연금 칼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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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전경.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전경.

조양호(70) 한진그룹 회장이 경영권이 박탈된 사례는 국민연금의 막강한 위력을 보여준 사례다. 2.5%의 지분이 운명을 가르는 박빙의 상황에서 2대 주주(11.56%)인 국민연금의 ‘반대 표’는 조 회장에게 결정타가 됐다. 국민연금이 10%이상 지분을 가진 상장사는 97개다. 이들을 포함한 상장사 오너들에게 639조원(지난해 12월말 기준)의 국민연금이 언제라도 ‘저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원칙)를 도입한 후 기업 경영 간섭을 본격화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섰다. 지난 1월 공정경제추진 전략회의에서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라고 말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도 그 무렵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국민연금은 기금의 장기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해) 투명하고 공정하게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대한항공을 겨냥했다.

 대통령·장관까지 나서는 배경에는 국민연금의 이상한 지배구조가 있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20명 중 5명이 현직 장ㆍ차관이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당연직으로 들어간다. 위원장은 복지부 장관이 맡는다. 주주권 행사 여부를 검토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14명도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추천을 받아 복지부 장관이 위촉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인사권은 연금공단 이사장이 쥐고 있다. 게다가 본부장(CIO)은 청와대에서 사실상 관장한다. 지난해 7월 CIO에 응모한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 파동 때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진국은 다르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주요 국가의 연기금 중 기금운용을 담당하는 이사회나 위원회가 정부 소속인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라며 “기금운용 결정 과정에서 정부 입김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자산규모 기준 해외 5대 연기금은 독립성과 전문성을 보장한다. 일본 GPIF, 캐나다 CPPIB, 미국 캘퍼스(CalPERS), 네덜란드 ABP 등은 의사결정기구의 독립성이 보장돼있다. 위원장은 기업ㆍ학계 전문가가 맡는다. GPIF, CPPIB, ABP의 이사회 내 정부 인사는 0명이다. 모두 경제ㆍ금융, 연기금 전문가이거나 기금을 조성하는 사용자ㆍ노동자 대표로 구성된다. 미국 캘퍼스는 주(州)공무원과 교육공무원들을 위한 직역연금인만큼 주 정부인사 4명이 참가한다. 나머지 위원 6명은 가입자 선거로 선출돼 독립성이 보장돼 있다.

 복지부는 지난해 10월 기금운용위 외부위원 14명을  ‘금융이나 경제, 자산운용, 법률, 사회복지 분야 경력 3년 이상’ 자격 요건을 갖추도록 개편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용자ㆍ노동자 단체에서 반발하자 4명만 자격 요건을 적용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지난해 6월 정부 위원을 4명에서 2명으로 줄이는 안을 제시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전광우 전 연금공단 이사장은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의사결정한다면 주주가 주주권을 행사하는건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지배구조 자체가 시장과 투자자, 국민에 신뢰와 설득력을 주는 구조가 아니다. 이대로면 정권에 따라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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