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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나라서 고통…” 고려인 눈물 닦아주는 수호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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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 18일 광주 고려인마을의 무료 법률상담소를 찾은 고려인들이 노강규 변호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임금체불부터 범죄·상해 ·비자 문제 등에 대한 상담이 이뤄진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8일 광주 고려인마을의 무료 법률상담소를 찾은 고려인들이 노강규 변호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임금체불부터 범죄·상해 ·비자 문제 등에 대한 상담이 이뤄진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8일 오후 7시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사진). 일과를 마친 고려인들이 진료소 건물 앞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주 월요일 열리는 무료 법률상담을 받기 위해서다.

광주 고려인마을 무료 법률상담소 #한국말 서툴고 외국 국적 … 이중고 #변호사 13명, 노무사 4명 의기투합 #2년간 체임·사기 피해 594건 상담

고려인들은 이날 상담자인 노강규(56) 변호사에게 속사정을 털어놨다. 임금 체불부터 범죄·상해·폭행·소송·비자 문제까지 다양했다. 김 세르게이(55·가명)씨는 “작업 중 팔을 다쳐 3개월째 일을 못 했는데 산업 재해를 신청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며 “매일 식비와 방값 때문에 막막했는데 한시름을 놨다”고 했다.

고려인 4000여 명이 모여 사는 광주 고려인마을에는 수호천사가 있다. 고려인마을의 법률지원단 소속 변호사 13명과 노무사 4명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2017년 8월부터 고려인들의 각종 소송과 범죄 피해 문제를 돕고 있다. 고려인들은 한국어가 서툰 데다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한 경우도 많아 각종 범죄에 취약하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이주한 한인들이다. 1937년 스탈린 시절에는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하면서 궁핍한 삶을 살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조부나 증조부 고향인 한국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경제·문화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려인마을에 법조인의 도움이 시작된 것은 2017년 5월. 고려인 3세인 리모(46·여)씨 등 3명이 브로커에게 속아 1450만원을 뜯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재외 동포법상 고려인 3세까지만 영주권을 주고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하는 점을 노린 사기였다. 피해자들은 당시 “자녀들이 영주권을 받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돈을 건넸다가 돌려받지 못했다.

이 소식은 광주 YMCA 시민권익변호인단에서 무료 변론 활동을 해온 강행옥(59) 변호사 귀에 들어갔다. 강 변호사는 곧바로 고려인마을을 방문해 무료 소송을 해준 끝에 리씨 등의 돈을 찾아줬다. 강 변호사와 동료 변호사들이 고려인마을로 활동 영역을 넓힌 신호탄이었다.

현재 법률지원단에는 단장인 강 변호사와 김경은(40), 김나윤(49·여), 김상훈(49), 김지현(45·여), 노강규(57), 송지현(59·여), 신광식(55), 윤춘주(52), 이민아(48·여), 정인기(48), 최형주(42·여), 홍지은(39·여) 변호사가 참여한다. 지원단 출범 후 정강희(55), 김사헌(34), 이진훈(51), 임미라(47·여) 노무사도 가세해 임금 체불과 산업 재해 문제를 돕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말까지 총 594건의 무료지원을 해줬다. 임금체불 536건(90%)과 산재 17건(3%), 비자 문제 15건(3%), 기타 21건(4%) 등이다. 단장인 강 변호사는 “고려인 대부분이 변호사 선임료조차 대기 힘든 형편”이라며 “어렵게 사는 동포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많다는 걸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인마을은 국내 대표적인 고려인 집단마을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고려인 4만여명 가운데 10%가량이 광주 광산구 월곡·산정·우산동 일대에 살고 있다. 1만여명이 사는 경기도 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이곳에는 종합지원센터와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청소년 문화센터 등이 고려인들의 한국 생활을 돕고 있다. 신조야(64·여)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는 “무료 법률상담은 지난 1월 문을 연 진료소와 함께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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