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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A’의 박찬욱 감독, 팔레스타인에 빠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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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리틀 드러머 걸’ 촬영현장. 박찬욱 감독 옆은 할리우드 배우 마이클 섀넌은 극 중 첩보전의 연출제작자인 이스라엘 정보국 요원 역을 맡았다. [사진 왓챠]

‘리틀 드러머 걸’ 촬영현장. 박찬욱 감독 옆은 할리우드 배우 마이클 섀넌은 극 중 첩보전의 연출제작자인 이스라엘 정보국 요원 역을 맡았다. [사진 왓챠]

“6시간 좀 넘는 것 알고 오신 거죠?”

첫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공개 #사랑·첩보 버무린 6부작 감독판 #영·미 방영 이어 온라인서 틀어 #“폭력의 악순환에 동병상련 느껴”

상영 전 무대에 오른 박찬욱(56) 감독의 너스레에 300여 관객이 일제히 웃었다. 지난 23일 서울 씨네큐브 극장에서 열린 그의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정주행 시사회는 열기가 뜨거웠다. 관람객 응모에 5만 명이 참여해 경쟁률이 160대 1에 달했다.

여러 영화로 해외에서도 이름난 그가 TV드라마를 연출한 건 이번이 처음. 실제 첩보원 출신인 영국 작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에 바탕한 로맨스 첩보물이다. 영국이 주도한 다국적 제작과정으로 완성돼 지난해 영국 BBC와 미국 AMC채널에서 방영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각국 방송규정에 맞춘 버전. 박 감독이 편집권을 갖고 마음껏 매만진 감독판은 이날 처음 공개됐다. 단 하루의 극장 상영에 이어 29일 국내 온라인 플랫폼 왓챠에서 6부작을 한꺼번에 독점 공개한다. 심의가 엄격한 지상파가 아니라 왓챠를 택한 이유를 감독은 “애초의 의도가 정확히 구현된 버전을 온전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틀 뒤 다시 만난 감독은 “이 작품과 함께한 긴 세월이 이제야 좀 정리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극장에서 6부작을 다 본 게 저도 처음”이라며 “방송판조차 첫 2회만 런던영화제를 통해 극장에서 봤다. 뭔가 미진한 기분이었는데 그저께 감독판을 극장에서 보고 나니 이제야 마무리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우연히 만난 남자 가디에 이끌려 첩보전에 참여한 주인공 찰리는 점차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우연히 만난 남자 가디에 이끌려 첩보전에 참여한 주인공 찰리는 점차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리틀 드러머 걸’을 제대로 만들려다 첫 드라마를 하게 됐다고.
“르 카레 선생의 팬으로 오래 살아왔지만, 이 작품은 아내의 추천으로 비교적 최근에 봤다. 직업 스파이 세계를 비정하고 건조하게 묘사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등을 좋아하는데, 그와 달리 평범한 여성 주인공에 로맨스가 있어 처음엔 시큰둥했다. 반쯤 읽다 보니 첩보물을 넘어선 심오한 얘기더라.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걸작이었다. 선생의 두 아들을 직접 찾아가 작품을 하고 싶다고 청했다. 영화로 하려면 인물들을 이것저것 다 쳐내야 하는데 그러기엔 아까웠다. 같은 원작으로 1984년 나온 미국 영화를 보니 억지로 줄이면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알겠더라. 미니시리즈가 운명이었다.”

드라마의 배경은 1979년 유럽. 영국 여성이자 반항적 기질의 연극배우인 찰리(플로렌스 퓨)가 우연히 만난 남자 가디(알렉산더 스카스가드)로 인해 이스라엘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며 팔레스타인 분쟁에 휘말리는 얘기다. 현실을 무대로 목숨 건 연기에 나선 찰리의 고뇌와 러브스토리가 인간적인 공감을 이끈다.

감독판은 해외 방송판과 뭐가 다른가.
“편집 자체가 다르거나, 같은 장면인데 다른 촬영본을 택한 경우도 있다. 방송국과 취향이 달랐던 면도 있고, 영국은 폭력 묘사에, 미국은 노출과 욕설에 엄격한데 제 입장에선 ‘아무것도’ 못한단 얘기였다(웃음). 심하게 자극적인 장면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두고 싶은데 덜어내야 했던 아픔을 감독판에서 다 풀었다. 6부작을 81회차에 찍다 보니 정신없이 편집해 아쉬웠던 부분들도 시간을 들였다. 빨리 냉면 먹으러 한국에 돌아오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방송 끝나고도 두 달을 더 매달리며 다시 만졌다. 이 작품은 이것(감독판)으로 남아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다.”
역사적 비극 속에 개인들의 유대와 고통을 다룬 점은 ‘공동경비구역 JSA’와도 연결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다국적 갈등을 외국인 입장에서 다루기가 조심스러웠을 텐데.
“해외에는 ‘올드보이’나 ‘아가씨’가 많이 알려졌지만 이번에 제가 연출을 맡을 수 있었던 데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많이 작용한 듯하다. 극 중 그려지는 끝없는 분쟁, 뭔가 하나 공격하면 더 크게 앙갚음하며 커져가는 폭력의 악순환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알게 모르게 동병상련이 있었다. 저 나름대로 잘 모르는 역사를 실수하지 않도록 공부도 열심히 했다. 제작사를 통해 영국에 사는 이스라엘이나 아랍 사람들에게 불쾌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며 만들었다. 오히려 외부인이기에 객관적이고 날카롭게 다룬 부분도 있었다. 예컨대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때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싸우고 있던 이스라엘과 아랍 양쪽 모두에게 그 땅에 나라를 짓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원죄 같은 것들 말이다.”
주연 배우 플로렌스 퓨에 호평이 쏟아지는데.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반했다. 아침식사를 청했는데 말도 잘하고 생각이 또렷하더라. 그의 타고난 호기심, 용기, 대담성이 찰리의 위험한 선택들을 자연스레 납득시켜줬다.”
또 드라마를 연출하게 될까.
“영화가 기껏 130분 분량인데 그 안에 도저히 넣을 수 없는 꼭 하고 싶은 스토리가 있다면.”

그는 드라마를 또 할 경우 “스트리밍 서비스 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면서 “플랫폼 자체에 거부감은 없는데 굉장히 큰 걸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심하고 있다”고 했다. 넷플릭스 영화의 경우처럼, 극장 상영이 힘들다는 것을 가리키는 얘기다.

다음 작품은.
“할리우드 서부극을 염두에 두고 오랫동안 각본을 만지고 있다. 아직 확정은 아니다. 국내 작품으로도 미스터리 수사물을 준비 중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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