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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 떼고 만난다… 수영장, 가장 평등한 능력사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22)

요즘은 동네 곳곳에 실내수영장이 많아져 마음만 먹으면 새벽이나 저녁 시간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수원시]

요즘은 동네 곳곳에 실내수영장이 많아져 마음만 먹으면 새벽이나 저녁 시간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수원시]

퇴직 후 잘한 일 하나를 꼽으라면 아내와 꾸준히 수영장에 다니면서 어설프던 수영 실력을 완성한 것이다. 수영은 중장년층에게 참 좋다. 초보일수록 운동이 많이 되니 배가 들어가고 뻣뻣하던 몸도 유연해진다. 돈 적게 들고 몸도 항상 청결하게 유지된다. 또 하나, 사람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일상의 인간관계와는 좀 다르다.

우리는 불공정한 상하관계에 불만일 때 “계급장 떼고”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런데 군대나 회사처럼 그런 관계가 외부로부터 강제되지도 않는데 스스로 길들기도 한다. 아무 이해관계도 없이 외면적 이유로 주눅 드는 것이다. 부자 앞에서는 얻어먹은 것 없이 공손해지고, 검사 앞에서는 죄 없이도 조심스러운 것처럼 비싼 옷과 차, 수행원, 학벌, 지위 같은 조건에 현혹되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씁쓸해진다.

요즘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을 자주 접한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출발부터 불리한 경쟁을 시작한다는 젊은 세대의 한탄이 응축된 말이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기성세대로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수영하는 사람들 모습이 떠오른다.

수영장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능력사회다. 수영장에서는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 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감추거나 자랑할만한 도구가 없다. 내 재산은 오직 내 몸과 행동, 그리고 그것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뿐이다.

“총장님 자세가 왜 그래?” 언젠가 수영장에서 나오면서 무심코 아내에게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초급레인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는, 나보다 십 년쯤 위인, 그냥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나 큰형님 정도 되는 것 같던 그분이 대학교 총장님이란다. 총장님은 태어날 때부터 수영하는 자세가 좋아야 하나, 아니면 수영복 맵시가 남달라야 하나? 총장님도 물 먹으면 허벅허벅하며 정신 못 차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수영장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능력사회다. 수영장에서는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 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감추거나 자랑할만한 도구가 없다. 사진은 광주광역시 남부대 국제수영장. [중앙포토]

수영장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능력사회다. 수영장에서는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 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감추거나 자랑할만한 도구가 없다. 사진은 광주광역시 남부대 국제수영장. [중앙포토]

수영을 마치고 바깥에서 만나는 모습은 또 다르다. 총장님다운 인격과 기품이 넘친다. 그런데 운동 후에는 나의 성향이 맑아져서 그런지 그쪽이 어떤 지위를 가졌든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수영장에서는 문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짙은 문신과 왕성한 근육도 물속에서는 힘의 상징일 수 없다. 물에서는 수영 실력이 곧 신분이다. 몸이 유연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앞서나가면 그걸로 서열정리는 끝난다.

무서운 문신? 글쎄? 강습 후 물속에서 일렬로 서서 앞사람 근육을 풀어주는데 친해지면 문신을 만지거나 손가락으로 외곽선을 따라 그려보기도 한다. 소주잔 나누면서 알게 된 문신의 이유는 생각하던 것과 아주 달랐다. 가령 부인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 같은 것이다.

물론 수영장에도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늦게 들어온 사람을 무조건 후배라 생각해서 앞에 치고 나가면 싫어하거나, 남의 자세 지적하며 가르치려 들거나, 강사에게 특별대접 받으려는 사람들, 아니면 초보자를 비웃고 하대하는 사람들… 수영장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비슷한 비율로 존재하는 꼰대일 뿐이다.

원래 수영장은 편치 않은 공간이다. 옷을 벗어야 하고 차가운 물에 들어가야 하며 시력이 나쁘면 앞도 보이지 않고 실내가 윙윙거려 소리도 잘 안 들린다. 그리고 친교보다 ‘수영’이라는 목적이 우선이니 사람 사귀기도 쉽지 않다.

수영하면서부터 휴가지에서도 즐길 거리가 더 풍부해진 느낌이다. 몸이 좋아졌다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사진 박헌정]

수영하면서부터 휴가지에서도 즐길 거리가 더 풍부해진 느낌이다. 몸이 좋아졌다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사진 박헌정]

적응의 해법은 ‘인사’다. 처음에는 인사해도 받는 둥 마는 둥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 상어나 물개, 하다못해 개구리나 오리만큼도 수영에 재주가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 아무리 최상급 실력자라도 물이 땅만큼 편할 리 없다. 누구든지 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긴장되고 경직된다.

강습이 끝나고 샤워할 때 보면 긴장이 풀려 모두 아이들처럼 시끌벅적해진다. 운동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러니 처음에는 어색해도 열심히 인사하다 보면 낯이 익은 후 ‘선배님’들이 “많이 느셨네요.” 하며 먼저 말을 붙인다. 그곳도 ‘신입’이 일정하게 수혈되어야 하는 사회이므로 본인만 좀 상냥하면 ‘포섭’당하게 되어 있다.

수영을 통해 깨우친 것은 ‘힘 빼기’다. 사람은 누구나 엄마 뱃속에서 양수에 둘러싸여 지냈기에 물은 편안하면서도 외로운 공간이다. 엄마를 믿고 온몸의 힘을 풀고 자연스럽게 있으면 가장 편하지만 누군가를 의심하고 힘을 풀지 못하면 지루하고 답답할 뿐이다.

수영은 간단하다. 물리법칙을 믿고 힘을 빼면 물 위에 뜨게 되어 있다. 아니, 웬만한 실력 아니면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도 힘들다. 그런데 힘 빼는 게 쉽지 않다. 골프나 당구 같은 걸 해보면 알겠지만 운동 신경 좋은 사람일수록 힘을 잘 뺀다. 힘도 없는 사람이 힘을 못 빼는 걸 보면 좀 딱하기도 한데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한다.

힘 빼기, 그게 꼭 수영에만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은퇴나 이사처럼 새로운 환경에 몸담을 때는 항상 힘을 빼야 한다. 나를 믿고 주변을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힘을 풀면 가까워지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퇴직 후 2~3년간 수영에 푹 빠져 나도 모르게 그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 다행스럽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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