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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등따시고 배부르다'는 네이버 직원은 왜 노조를 만들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베타 테스트' 중인 판교 밸리 IT기업 노조

지난 20일 오후 경기 성남시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열린 네이버 노조 공동성명의 3차 쟁의 때 꿀벌 탈을 쓰고 나온 노조원. 사진=김정민 기자

지난 20일 오후 경기 성남시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열린 네이버 노조 공동성명의 3차 쟁의 때 꿀벌 탈을 쓰고 나온 노조원. 사진=김정민 기자

지난 20일 오후 6시 경기도 성남 네이버 사옥 앞. 봄비답지 않은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꿀벌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이어 하얀 우비를 뒤집어쓴 200여명의 사람이 야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과 빨간색 응원막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줄을 맞춰 방석 위로 앉았다. 스피커에선 GOD의 '촛불 하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 유감' 등 90년대 인기 가요에서부터 래퍼 제리케이의 '콜센터' 등 비교적 최근 곡이 흘러나왔다. 언뜻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마치 야구 응원 연습 같은 이 장면은 네이버 노조 ‘공동성명(共動成明)’의 집회현장이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네이버 직원들이 지난해 4월 정보기술(IT) 업계 최초로 노조를 설립한 이후 넥슨, 스마일게이트, 카카오 등 판교 테크노밸리 기업에도 잇달아 노조가 들어서고 있다. 모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화학섬유 식품노조 산하 지회이지만, 이들 노조의 행보는 통상 일반인들이 노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르다.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을 외치기보단 동아리방 같은 노조 사무실을 꾸며 놓고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나와서 시위를 하는 등 발랄하다 못해 통통 튄다. 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IT 회사 노조만의 색을 입히기 위한 ‘베타 테스트’(정식 프로그램 출시 전 오류가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일부 사용자들이 써보도록 하는 테스트) 중”(이수운 네이버 노조 홍보국장)이라서다. 대체 판교 밸리 근로자들은 어떤 노조를 꿈꾸며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판교 밸리 노조는 이름부터 게임용어

넥슨노조 스타팅포인트 카카오플러스친구 화면

넥슨노조 스타팅포인트 카카오플러스친구 화면

‘게임을 만들고 서비스하던 사람들이 노동조합이란 생소한 조직을 꾸리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 노조 안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국어보다 C언어(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더 많이 쓰던 사람이고, 조합원이 만나는 사람은 친구보다 '피겨(figure)'가 더 많습니다. 모자람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개인의 약점을 연대를 통해 보완함이 노동조합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넥슨 노조 사무실에 잇는 피규어. 뒤의 빨간 깃발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우)에 나오는 호드 깃발. [사진 스타팅포인트]

넥슨 노조 사무실에 잇는 피규어. 뒤의 빨간 깃발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우)에 나오는 호드 깃발. [사진 스타팅포인트]

국내 최대 게임사인 넥슨 노조가 지난 2월 카카오 플러스 친구를 통해 공개한 노조 소식 중 한 대목이다. 넥슨 노조의 이름은 '스타팅포인트'. 통상 게임 내에서 사용자가 게임을 시작하는 지점을 의미하는 용어다. 배수찬 넥슨 노조 지회장은 “회사와 직원 특성에 맞게 노조도 운영한다”며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게 익숙한 세대인 만큼 카카오 플러스 친구로 노조 소식을 전하고 조합원들이 동아리방처럼 느낄 수 있게 사무실도 꾸몄다”고 말했다. 실제 판교 밸리 소재 스타팅 포인트 사무실에는 빨간색 깃발이 걸려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에 나오는 종족 중 하나인 '호드' 진영의 깃발이다. 사무실 선반에는 게임 속 캐릭터 피겨가 가득하다.

스마일게이트 노조 가입화면                         [스마일게이트 홈페이지 캡처]

스마일게이트 노조 가입화면 [스마일게이트 홈페이지 캡처]

다중 접속 역할 게임(MMORPG)인 '로스트 아크'로 유명한 게임사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가입 홈페이지엔 ‘SG 길드와 함께 비상식의 벽을 레이드 합시다’라는 문구가 걸려있다. ‘SG 길드’는 노조 이름으로 MMORPG에서 형성되는 유저들의 모임 집단을 의미하는 '길드'라는 용어를 빌려와 만들었다. '레이드'는 게임 용어로 강력한 게임 속 캐릭터에 맞서기 위해 여러 명이 팀을 짜서 한꺼번에 덤비는 것을 의미한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 노조 지회장은 “IT업계 사내 분위기를 담고 싶어서 SG 길드라고 이름을 지었다”며 “노조 운영진은 GM(길드 매니저)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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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은 왜 화학섬유 식품산업노조에 가입했을까. 배수찬 지회장은 “게임업계, IT업계를 이해할 수 있는 상위노조 중 규모가 있는 곳, 젊은 층이 많은 곳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판교 IT기업들, 잇따른 포괄임금제 폐지

지난 20일 오후 경기 성남시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네이버노조 공동성명은 3차 쟁의를 열었다. 사진=김정민 기자

지난 20일 오후 경기 성남시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네이버노조 공동성명은 3차 쟁의를 열었다. 사진=김정민 기자

기존 문법에서 벗어난 발랄한 운동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존재감도 점차 커지고 있다. 현재 ITㆍ게임업계에서 확산 중인 ‘포괄임금제’ 폐지가 대표적이다. 포괄임금제는 야근 등 시간 외 근로 수당을 급여에 포함해 일괄 지급하는 임금제도다. 추가근무를 해도 따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돼 노동시간을 과도하게 늘린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네이버는 지난해 7월 포괄임금제를 폐지했다. 넥슨은 오는 8월부터 폐지하기로 노사 간 합의했으며 스마일게이트도 지난 19일 폐지하기로 노사가 잠정 합의했다. 이수운 네이버 노조 홍보국장은 “흔히 IT기업을 밤새 불이 켜져 있어 ‘○○의 등대’라 부르며 자랑스러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며 “과도한 업무와 쫓기는 일정으로 '개발자를 갈아 만든 서비스(게임)'를 더는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배부른 이들의 귀족 노조' 비판도  

판교 밸리 IT기업에 노조가 세워진 지 불과 1년도 안 됐지만, 이들 노조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업계에서 가장 급여도 많고 복지도 좋은 회사에서 배부른 투정을 부린다는 ‘귀족노조’ 지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기업, 근로여건이 좋은 기업도 노조를 만들 권리가 있다고 반박한다. 이수운 국장은 “노조 귀족(노조원이 된 후 이기주의)은 경계해야겠지만 노동을 제공하는 누구나 노조를 만들 권리가 있다”며 “우리가 바꾸어야 다른 데도 바뀌고 진짜 열악한 IT 회사 직원들도 자기 권리를 주장할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판교=박민제·김정민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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