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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 시간’ 정부의 세계 최초 5G 재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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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태희
박태희 기자 중앙일보 팀장
박태희 산업2팀 기자

박태희 산업2팀 기자

근로자가 1주일에 52시간 넘게 일하면 사업주를 형사처벌하는 제도를 도입하던 지난해, 가장 반발이 심한 곳은 정보기술(IT) 분야였다. 스마트기기나 게임 개발자들의 업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획일적 조치라는 반발이었다. 이들은 출시 전엔 여러 달 밥 먹듯 야근하다 출시 후 장시간 휴식하는 ‘큰 사이클’로 일한다. 전 세계 개발직군이 모두 비슷하다. IT업계 한 종사자는 “개발직은 일을 오래 하는 게 스트레스가 아니라 출시일 다가오는데 일을 못 하는 게 더 스트레스”라고 전했다.

세계 최초 5G 상용화라는 타이틀을 다른 나라에 뺏기고 싶지 않은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제조사와 통신사에 재촉 강도를 높여왔다. “3월 말이면 5G가 시작될 것”이라는 말은 그간 제조사나 이통사가 입에 올린 적 없다. 과기정통부가 ‘나를 따르라’며 기치를 들었을 뿐이다. 미국 버라이즌이 내달 11일 5G를 상용화하겠다고 선언하자 최근 과기정통부의 닦달은 더 세졌다.

현재 삼성전자 5G 단말기 개발 인력들은 전 직원이 출시일 당기기에 매달리고 있다. 삼성전자 개발직군은 선택적 근로시간제로 일하는데 ‘월평균 주 52시간’을 맞춘다. 한 주에 52시간 넘게 일하면 한 달 안에 다른 주에서 근로시간을 줄여 평균 52시간을 넘지 않게 조절한다. “전 직원이 밤낮없이 개발에 매달리고 있느냐”는 질문에 삼성전자 측은 “그렇다”고 답했다가 이후 다시 연락해와 “그래도 위법하지 않게 일하고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52시간 넘게 일하지 말라는 제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5G 단말기를 세계 최초로 내놓으라’는 상반된 신호 사이, 난처한 입장이 읽힌다.

개발직 등이 큰 사이클로 일해도 위법하지 않게 보장하는 제도가 있다. 바로 탄력근로제다. 정부도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열어 도입을 논의해왔다. 경사노위는 지난달 19일에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6개월로 확대한다는 합의안을 발표했지만 의결을 거치지 못했다. 이어 지난 7일과 11일, 최고의결기구인 본위원회를 열어 최종 의결을 시도했으나 모두 정족수 미달로 실패한 뒤 어정쩡한 상태에서 국회로 넘긴 상태다. 경사노위 파행 속에 국회와 정부가 갈등 해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산업현장만 곤욕을 치르고 있다.

글로벌 산업 현장은 ‘최초’ 타이틀 확보를 위한 전쟁터다. ‘워라밸’을 중시하자는 정책 취지는 옳지만 융통성 없는 입법은 산업경쟁력에 두고두고 부담이 된다. 이번 5G 개통 과정이 정부에게 세심한 정책, 꼼꼼한 입법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박태희 산업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