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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정부와 전교조가 부추기는 ‘영어 불평등’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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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혼돈의 영어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다

교육 기회 균등 제공, 더 나아가 교육을 통한 평등 사회 실현. 정치인·관료·교육자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이상(理想)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행동이 달라 그들은 늘 의심받는다. 영어 교육을 일례로 보자. 시간과 비용 면에서 사교육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원비를 대기 어렵거나 사교육에 반대하는 부모의 자녀도 학교에서 충분히 배울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외치는 이상에 부합하는 상황이다.

초 1·2는 방과 후 수업도 금지 #전교조는 원어민 교육을 반대 #학자·관료 자녀는 영어 금수저 #그들 위선에 휘둘리지 말아야

그런데 현실은 이상하다. 유치원에서 노래·놀이를 통해 영어를 접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면 영어와 단절된다. 적어도 학교에선 그렇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영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돼 있다. 그 기간에 학원에 다니며 영어 공부를 한 아이들과 2년 동안 알던 것마저 잊은 아이들이 3학년 교실에서 만난다. 교사들에 따르면,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입을 여는 데 주저하고 주눅 든 태도를 보이기 일쑤다. 그 작은 격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영포자’(영어 포기 학생)를 만들기도 한다.

영국인 교사 스테파니 험프리스가 광주 광천영어센터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초등학교 3·4학년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이 운영하는 이 센터의 수업료는 한 달에 3만5000원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영국인 교사 스테파니 험프리스가 광주 광천영어센터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초등학교 3·4학년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이 운영하는 이 센터의 수업료는 한 달에 3만5000원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초 1·2는 학원으로 가라”=광주광역시 광천영어센터에 가 봤다. 광천초등학교 안에 있어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이 도시엔 시 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어센터 네 개가 있다. 시를 네 개의 권역으로 나눈 뒤 각 지역에 하나씩 뒀다. 22일 오후 이 센터에서는 방과 후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2시 20분부터 4시 40분까지 40분 단위로 총 16개 수업이 있었다. 인근 지역에 사는 초등학생 160명이 월·수·목·금 네 차례 학교가 파한 뒤 이곳에서 공부한다. 미국·영국에서 온 원어민 교사 세 명과 한국인 강사 세 명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부모가 내는 돈은 3개월에 10만5000원이다. 비슷한 수업이 이뤄지는 학원에 비하면 수업료가 5, 6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 이곳에 초등학교 1·2학년 학생은 한 명도 없다. ‘선행학습 금지’ 조치가 이곳에도 적용돼 지난해부터 1·2학년 대상 수업은 할 수 없게 됐다.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1·2학년 학생도 방과 후 영어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지난 13일에야 ‘공교육정상화법’이 개정됐다. 이미 학교들이 짜놓은 계획대로 수업하고 있어 1·2학년 영어 방과 후 수업은 일러야 다음 학기부터 다시 시작된다. 광천영어센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야 대치에 의한 국회 파행 때문에 법 개정이 미뤄지지 않았더라면 이번 학기부터 가능했을 일이다.

이 센터에서 송모(9)군을 만났다. 1학년 때인 2017년에 이곳에 다니다 ‘강제 휴업’을 하게 됐고, 3학년이 돼 다시 올 수 있게 된 학생이다. 지난 1년 동안 학원에 다니지는 않았고 집에서 혼자 영어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송군 어머니는 전화통화에서 “나라에서 영어 공부는 3학년 때부터 해도 된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아이가 온라인 영어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종종 공부하기는 했는데, 꾸준히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곳의 김순옥 전임강사는 “이런 아이들을 볼 때 가장 안타깝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스펀지처럼 학습 내용을 빨아들인다. 3학년만 돼도 벌써 영어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실수할까 봐 입을 잘 안 떼려고 한다. 이미 실력 차가 많이 나타나는 상태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초 1·2 방과 후 수업 혼란

초 1·2 방과 후 수업 혼란

◆‘영어는 초 3부터’가 옳은가=영어가 초등학교에서 정식 교과가 된 것은 김영삼(YS) 정부 시절인 1997년이다. YS의 ‘세계화’ 정책 중 하나였다. 입안 당시 “초등생들이 영어 학원으로 더 몰려들 것”이라며 반대하는 교육 단체들이 있었다. ‘3학년부터’에 대해 정부는 “모국어 습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뒤 종종 ‘1학년부터’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도 했으나 바뀐 것은 없다.

1학년부터에 반대하는 학자·관료·교사가 내세우는 ‘우려의 이유’는 크게 다음 세 가지다. ① 7, 8세가 모국어를 왕성하게 습득하는 때다. 이때 외국어를 가르치면 모국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할 수도 있다. ②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 사교육이 유치원으로 퍼질 가능성이 크다. ③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 공부를 해도 충분히 영어를 잘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이 만든 결과가 초등학교 1·2학년 영어 수업 금지다. 광천영어센터 원어민 교사 스테파니 험프리스는 이 같은 현실에 대해 “That’s ridiculous!”(웃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유치원에서 다들 영어를 배우는데, 초등학교 입학하면 영어를 그만 배우고 3학년에 다시 시작하라는 게 말이 되는가. 그렇다고 학생들이 모두 영어 공부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아이들에게 학원에 가라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자와 관료를 겨냥해 “위선적”이라고 지적했다. 대학교수와 교육부 고위직의 자녀 중 상당수는 소년기에 외국에서 영어 배울 기회를 얻는다. 부모가 교환 교수가 되거나 안식년을 가졌을 때 영어권 생활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이 아닌 곳에선 대개 국제학교에 다닌다. 교육부 고위 관료 중 해외 파견 경험이 없는 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들 자녀는 일찌감치 영어를 실생활에서 배울 기회를 가졌다. 외국 거주 경험의 문제만도 아니다. 정치인·관료·학자 중 자식이나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에 이를 때까지 영어 사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은 이가 과연 있을까. 김 교수가 말한 ‘위선’의 현실이다. 그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녀의 영어 실력 사이에 명백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국어·수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교육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부모 소득에 좌우되는 학력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영어 학습 기회를 갖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 영어는 입시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전교조가 반대하는 원어민 수업=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초등학교 원어민 교사 수를 늘리기로 했다. 서울시 공립학교 중 원하는 학교에는 모두 배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실행에 옮겨 이번 학기에 66명을 증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다음 학기에 20∼30명을 추가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 교육감은 “초등 3학년만 돼도 사교육 효과 때문에 영어 실력 차가 상당히 나타난다. 사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들이 빨리 영어 실력을 키워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원어민 수업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가 반대하고 나섰다. 자신들과의 협의를 서울시교육청에 요구했다. 김홍태 전교조 서울지부 대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초등교사들의 영어 실력이 향상돼 원어민 교사가 없어도 회화 수업이 충분히 가능하다. 원어민 교사를 관리하고 그들의 정착을 돕는 전담 교사의 과외 업무가 과중하다. 원어민 수업의 교육 효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이러한 전교조 움직임에 대해 하태경 의원(바른미래당)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원어민 교사가 아니라 전교조다”고 주장했다. 조 교육감은 “계획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 그대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영어 교육은 혼돈·위선·갈등에 휩싸여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속에서 영어의 벽에 부닥쳐 좌절하는 학생과 청년이 속출한다. 더는 국가가 이런 불행을 방치하거나 조장하지 않아야 한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를 외친 정부답게 공교육의 책무를 무겁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이상언 논설위원